계절에 한번씩 찾아가는 나주 반남.
연애시절 각별히 사랑을 쏟아 주시던 처할머니의 산소가 있어서
잊지 않고 가보는 곳입니다.
갈때마다 마주하는 어마어마하게 큰 '무덤'들은 언제나 의문을 던져 줍니다.
과연 누구의 무덤일까?
1999년 읽은 한권의 책 [우리역사의 수수께끼-우리 역사를 바꿀 34가지 오해와 진실]의
맨 첫 꼭지가 지금부터 이야기 하려는 반남고분군에 대한 이야기 입니다.
역사를 전공하지 않은 나로서는 몇장 찍은 사진으로밖에 반남고분군을 표현 할 수 밖에 없고,
책 내용을 인용해서 내가 믿는 고분군의 역사에 대해 말해 보렵니다.
[덕산리 고분군 6호분 쪽에서 바라본 4,5 호 고분]
나주 고분에서 받은 충격
경주나 부여,공주이 유적에 익숙한 사람들, 그래서 우리나라의 고대 유적은 신라와 백제, 그리고 가야가 전부인 줄 아는 사람들이 전남 나주 영산강 유역의 긜 잘 알려지지 않은 반남이란 작은 면일대에 산재해 있는 고분(古墳)들을 본다면 커다란 충격을 받을 것이 분명하다. 그 만큼 전라남도 나주군 반남면 자미산 일대에 산재해 있는 30여 기(基)의 반남고분군(古墳群)은 한국 고대사에 남겨진 최대의 비밀이다.
이 지역이 백제 영토였으니 부여*공주의 고분보다는 작으리란 예상을 가지고 이 곳을 방문한 사람들은 일단 그 엄청난 규모에 놀라움을 금하지 못할 것이다. 예를 들어 덕산리 3호분의 경우 무덤의 남북 길이가 46미터이고 높이가 9미터에 달한다.
이런 엄청난 규모는 백제 왕실의 고분들보다는 훨씬 커서 통일신라나 가야 왕실의 고분들과 비교해야 할 것이다. 이 정도 고분을 조성할 수 있었던 정치권력이라면 적어도 고구려*백제*신라*가야에 뒤지지 않는 세력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
도데체 이 거대한 고분구느이 주인공은 누구일까?
유홍준은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제1권의 1장에서 이 지역을 버스로 지나가며 마이크를 잡고 이렇게 설명한다.
"신촌리 제9호 무덤에서는 다섯 개의 옹광이 한꺼번에 나오면서 그 가운데 옹관에서는 금동관이 출토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이 금동관의 주인공은 누구일까요? 그것이 고고학과 역사학에서 매우 흥미로운 문제로 부각되고 있는데, 대체로 삼한시대 마한의 마지막 족장이 아닐까 추정되고 있습니다. 마한은 처음에 충청*호남지방에 근거를 두었는데 북쭉에서 쫓겨 내려온 백제에 밀려 충청도 직산에서 금강 이남인 전라도 익산으로 쫓겨갔다가 4세기 후반 근초고왕의 영토확장 때 이곳 영산강까지 밀리게 되며, 이후 백제가 공주*부여로 내려오면서 더욱 압박을 받게 되어 5세기 말에는 완전히 굴복하고만 것으로 추정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반남고분군은 대개 5세기 유적으로 비정되고 있죠."
유홍준의 설명처럼 이 반남고분군을 마한의 유적으로 설명하고 있는 것이 현재 학계의 불완전한 추측이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난 추측 차원이고 본격적인 설명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 반남고분군은 매장 방법도 한반도의 다른 지역에서는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특이하기 때문에 관심의 대상이다. 고분들은 거대한 하나의 봉토(封土) 내에 수 개 혹은 수십 개 이상의 시신을 담았던 옹관(甕棺:항아리관)이 합장되어 있는 것도 특이하며, 몇몇 고분 조사에서 밝혀지고 있듯이 봉토 주위에 도랑이 존재했던 점도 특이하다. 옹관 규모도 우리들을 흥분시키기에 충분한데, 큰 것은 그 길이가 3미터, 무게가 0.5토이나 되는 것도 적지 않다. 그리고 그 안에는 금동관(金銅冠) 및 금동제(金銅製)의 호화로운 장신구와 환두대도(環頭大刀) 등 무기류들이 부장되어 있었다.
발굴보고서를 내지 않는 일본
처음 이 고분들을 주목했전 것은 일본인들이었다. 일본은 '고분시대(古墳時代)'를 하나의 시대로 시기 구분하는데, 반남고분군이 일본의 고분들과 겉모양이 유사했기 때문이다. 신촌리 9호분에서 발굴 된 금동관 역시 일본 쿠마모토[態本]현 후나야마[船山] 고분에서 출토한 것과 유사하다. 이러한 특이한 점들 때문에 반남고분군은 일제시대 초기 비상한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반남고분군을 최초로 조사한 기관은 조선총독부 고적조사위원회(古蹟調査委員會)인데, 1917~1918년에 곡정제일(谷井濟一), 소장항길(小場恒吉), 소천경길(小天敬吉), 야수건(野守楗)등 4명의 위원들이 나주군 반남면 신촌리, 덕산리, 대안리 일대 고분들 가운데 신촌리 9호분, 덕산리 1*4호분과 대안리 8*9호분 등을 발굴*조사하였다. 그러나 대대적인 발굴 조사와는 달리 이들은 곡정제일이 단 한족짜리 보고서만 세상에 내놓는 것으로 발표를 갈음했다. 다음은 당시 내놓은 보고서 전문이다.
"반남면 자미산 주위 신촌리, 덕산리 및 대안리 대지 위에 수십 기의 고분이 산재하고 있다. 이들 고분의 겉모양은 원형(圓形) 또는 방대형(方臺形)이며 한 봉토 내에 1개 또는 여러 개의 도제옹관(陶製甕棺)을 간직하고 있다. 지금 조사 결과를 대략 말하면 먼저 지반위에 흙을 쌓고 그 위에 도제의 큰 항아리를 가로놓은 뒤, 이에 성장(盛裝)한 시체를 오늘날에도 한반도에서 행해지고 있는 것처럼 천으로 감아서 판자에 얹은 뒤 머리 쪽부터 큰 항아리 속에 끼워 넣고 큰 항아리의 아가리에서 낮거나, 또는 아가리를 깨서 낮게 한 작은 단지를 가진 판자를 아래로부터 받친 뒤 약간 작은 항아리를 큰 앙아리 안에 끼워 넣어서 시체의 다리 부분을 덮고, 크고 작은 항아리가 맞닿은 곳에 점토(粘土)를 발라 옹관 밖의 발이 있는 쪽에 제물(祭物)을 넣은 단지를 안치하여 흙을 덮는다. 여기에서 발견된 유물 중에는 금동관과 금동신발, 칼[대도(大刀), 및 도자(刀子)]과 도끼, 창, 화살, 톱이 있고, 귀고리, 곡옥(曲玉), 관옥(管玉), 다면옥(多面玉), 작은 구슬 등 낱낱이 열거할 겨를이 없을 정도다. 이들 고분은 그 장법(葬法)과 관계 유물 등으로 미루어 아마 왜인(倭人)의 것일 것이다. 그 자세한 보고는 후일 <나주 반남면에 있어서의 왜인의 유적>이라는 제목으로 특별히 제출하겠다."
이들이 훗날 내놓겠다던 <나주 반남면에 있어서의 왜인의 유적>이란 보고서는 끝내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이 간단한 한 쪽짜리 보고서도 당시 고고학계를 흥분시키기에 충분한 정보를 담고 있었다.
그러나 이 보고서를 보고 먼저 움직인 것은 고고학계가 아니라 도굴꾼들이었다. 보고서 내용 중 "금동관, 곰동신발, 칼과 도끼' '귀고리, 곡옥, 관옥, 다면옥'등은 이들의 모험심에 불을 붙이기에 충분했던 것이다.
1차 발굴 조사 20여 년 후인 1938년에 일제는 다시 신촌리 6*7호분과 덕산리 2*3*5호분 등 옹관고분 5기와 흥덕리 석실분(石室墳)을 발굴*조사했는데, 조사에 참여했던 유광교일(有光敎一)과 택준일(澤俊一)이 "도굴의 횡액(橫厄)으로 이처럼 유례가 드문 유적이 원래 상태를 거의 잃어버리게 되었다"고 회고할 정도였다. 이들은 대부분의 고분이 도굴 당해 완전한 봉토가 거의 없었다면서, "신촌리 6호분에서 겨우 3개의 옹관을 수습 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런 도굴은 사실상 일제가 조장한 셈이었다. 일제는 1차 조사 후 한 쪽짜리 보고서에서 '금동관, 금동신발'등의 유물이 나왔음을 발표하고도 이 지역에 대한 아무런 보호조치도 취하지 않았는데, 이는 도굴꾼들에게 도굴 장소를 안내한 격이었다.
보고서의 "그 장법(葬法)과 관계 유물 등으로 미루어 아마 왜인(倭人)의 것일 것이다"라는 내용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는 구절이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일제가 시종일관 주장해 왔던 한반도내 '임나일본부(任那日本府)의 존재를 확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당시 일제는 <광개토대왕 비문>의 왜 침략 기사와 <일본서기> 기사를 바탕으로 고대 일본이 한반도 남부를 식민지로 경영했다는 임나일본부설을 주장했는데, 그들은 이를 한반도 침략을 정당화하는 이론으로 둔갑시켰던 것이다.
일본의 입장에서 '아마 왜인'일 가능성이 있는 한반도 내 유물이 출토되었으면 침묵을 지키거나 도굴을 조장할 것이 아니라 임나일본부설이 타당함을 대대적으로 선전해야 했다. 그러나 일제는 한 쪽짜리 면피용 보고서만 내놓은 채 침묵을 지키며 도굴을 조장했다.
왜 그랬을까? 반남고분의 출토 유물들이 임나일본부설을 지지하기는 커녕 임나일본부설을 뒤집을 수 있는 내용이기 때문이라는 것이 가장 합리적인 추측일 것이다. 다시 말해 반남고분군에서 출토된 유물은 고대 일본이 한반도 남부를 지배한 것이 아니라, 거꾸로 반남고분의 주인공들이 고대 일본열도를 지배했다는 사실을 말해 주기 때문에 덮어 버리고 도둘을 조장했다고 해석해야 할 것이다.
[반남고분군 안내도]
비밀에 쌓인 왜라는 국가
그러면 이 거대한 고분을 쌓은 주인공들은 누구일까?
먼저 일제의 한 쪽짜리 보고서의 '아마 왜인'이라는 구절에 주목해 고대 왜에 대해서 살펴보자. 진(晋)나라의 진수[陣壽]가 편찬한 중국 삼국시대[220~265] 66년 간의 정사(正史)인 <<삼국지(三國志)>>위서(魏書) 한전(韓傳)은 한과 왜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한은 대방(帶方)의 남쪽에 있는데, 동쪽과 서쪽은 바다로 한계를 삼고, 남쪽은 왜와 접해 있으며[南與倭接], 면적은 사방 4,000리쯤 된다. (한에는) 세 종족이 있으니, 마한*진한*변진이며 진한은 옛진국이다. 마한은 (삼한 중에)서쪽에 있다. ***지금 진한 사람 모두 납작머리이고, 왜와 가까운 지역[近倭]이므로 역시 문신을 하기도 한다. ***(변진의) 독로국은 왜와 경계가 접해 있다[與倭接界]."
위 기사에서 주목할 점은 왜의 위치가 한반도 밖이 아니라 한반도 안쪽, 즉 삼한의 남쪽인 한반도 남부에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지금껏 '왜는 일본열도에 있다'는 고정관념 속에서 이 기사를 보아 왔으므로 이 기사가 말해 주는 위치 비정을 무시해 왔는데 이런 고정관념을 해체하고, '(한의) 남쪽은 왜와 접해 있다[南與倭接]'는 기사를 해석하면 왜는 도저히 일본열도 내에 있을 수 없게 된다. '접[接]'은 육지로 서로 경계하고 있을 때 쓰는 낱말이지 바다 건너 있는 지역을 말할 때 쓰는 단어는 아니기 때문이다. 만약 바다 건너 왜가 있었다면 '바다[海]'로 동쪽과 서쪽의 경계를 표시한 이 기록이 유독 남쪽 경계를 표시 할 때만 바다를 생략할 이유가 없다.
또한 진한조에 '근처에 왜가 있다[近倭]'라는 구절과 변진 12개국 가운데 하나인 독로국도 '왜와 경계가 접해 있다[與倭接界]는 구절도 왜가 일본열도 내가 아니라 진한과 독로국 근처의 한반도 내에 있었다는 사실을 말해 준다.
[초록색 원 부분이 '반남고분군'의 위치]
<<후한서(後漢書)>>동이열전(東夷列傳) 한조(韓條)에서 왜의 위치를 추측해 보자.
"마한은 (삼한 중에) 서쪽에 있는데 *** 남쪽은 왜와 접해 있다. 진한은 동쪽에 있다. ***변진은 진한의 남쪽에 있는데, 역시 12국이 있으며, 그 남쪽은 왜와 접해 있다."
이 기록에 따르면 왜의 위치는 마한과 진한, 변진의 남쪽, 즉 한반도 남부이다. 따라서 왜는 적어도 중국의 삼국시대인 3세기 까지는 한반도 남부에 위치하고 있었다는 말이 된다.
그런데 <<송서(宋書)>> 왜국전(倭國傳)은, "왜국은 고려[고구려]의 동남쪽 큰 바다 가운데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는 중국 남북조 송나라(420~479) 때에는 왜가 한반도를 벗어나 일본 열도에 자리하고 있음을 알려 준다. 이후에 발간된 중국측 문헌들은 모두 왜가 일본열도에 자리잡고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런 기록들은 왜의 중심지가 5세기의 어느 시점부터 한반도를 떠나 일본열도로 이동하는 변화과정을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왜는 <<삼국사기>>등 우리나라 사료에도 비번히 등장하는데 그중 가장 중요한 사료는 <광개토대왕 비문>의 기사이다. 한일 양국 사이에 수십 년에 걸쳐 논쟁의 대상이 되었던 구절은 유명한 신묘년(서기391. 광개토왕1년, 백제 진사왕 7년, 신라 내물왕 36년) 기사이다.
"왜가 신묘년 이래 바다를 건너와 백제를 파하고, □□와 신라를 신민으로 삼았다.[]."
왜가 한반도 내에 있었다는 관점에서 바라볼 때 이 구절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바다를 건너와서()'라는 구절이다. 여기에 대해서는 일본의 어떤 탁본들은 '도해'라는 글자를 선명히 보여 주지만, 최근 광개토대왕비를 현지 답사한 이진희(이진희)는 종래 해자로 읽어 온 곳은 '혈'의 자획이며 '도(도)자도 확실치 않았다고 말하고 있다.
일본사 연구자들에 따르면 신묘년, 즉 4세기 후반에 일본은 통일된 정권을 형성하지 못하고 있었다. 즉4세기 후반에 일본열도 내에서 바다를 건너와 백제와 신라를 공결할 만한 정치세력은 존재하지 못했다는 것이 일본 학계의 연구결과이다. 그렇다면 신묘년에 백제와 신라를 공격한 왜는 한반도 내에 있었던 정치세력인 것이다.
당시 왜가 강력한 정치집단이었음은 김부식의 <<삼국사기>>에서도 확인 할 수 있다. <<삼국사기>>백제본기 아신왕 6년(397)에 "왕이 왜국과 우호관계를 맺고 태자 전지를 인질로 보냈다"는 기사 내용과 신라본기 실성왕 1년(402) 3월에 "왜국과 우호 관계를 맺고, 내물왕의 아들 미사은을 인질로 보냈다"는 기사는 당시 왜가 백제와 신라를 자신의 영향력 아래 두었던 강력한 정치집단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한반도에 있었던 왜가 백제와 신라를 영향력 아래 두고 고구려의 남하정책에 맞서 싸웠던 강력한 정치집단이었다. 그간 일본인들이 왜를 일본열도 내로 비정하면서 생겼던 모든 모순은 왜를 한반도 내의 정치집단으로 이해할 때 풀리게 된다.
일본 천왕가가 대륙으로부터 한반도를 거쳐 온 기마민족이었다는 '기마민족설'을 주장하여 일본 국내외에 큰 충격을 던진 강상파부(강상파부, 에가미 나미오)는 이렇게 설명한다.
"기마민족이 4세기 초에 바다를 건너 북규슈(북규슈)에 한왜 연합왕국을 수립"했다가 "4세기 말경에는 동북 기나이 지방에 대화(대화:야마토) 정권을 수립하는데, 그 주인공인 16대 오우[]천왕이 한왜 연합왕국의 주도자로서 남한지역에 군대를 보내서 신라를 제외한 남한 여러 나라와 연합하여 고구려의 남하에 대항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이는 4세기 말에 일본열도 내에 그런 일을 수행할 만한 정치집단이 없었다는 역사적 사실에 의해 부정되지만, 고구려의 남하에 저항했던 왜가 한반도 내에 있었다고 발상을 전환한다면 상당 부분 역사적 사실에 접근하게 되는 것이다.
한반도 내의 왜로 추정되는 정치세력은 <<일본서기(일본서기)>> 신공(신공) 49년(369)에도 보이는데, 백제 근초고왕과 함께 가야 7국과 마한 잔존 세력을 정복한 사건은 한반도 내의 왜가 수행한 군사정복일 가능성이 있다.
일본열도로 쫓겨가는 왜 왕국
그러나 한반도 내의 왜는 <광개토대왕 비문>의 기사에 의하면, 400년과 404년 두 차례에 걸쳐 고구려와 대규모 전쟁을 벌였다가 패하여 그 세력이 결정적으로 약화된다. 고구려와 더 이상 싸울 여력을 잃은 왜는 한반도 남부를 포기한 채 일본 규슈 지방으로 건너가는 것이다.
그리고 <<일본서기>>의 동정(동정) 기사는 이들이 수행한 열도 정복사건을 묘사한 것이다. 5세기 이후의 중국 기록들이 이전의 기사와는 달리 왜의 중심지를 한반도 남부가 아닌 일본열도로 기록한 것은 이런 변화한 사정을 반영하는 것이다.
왜 관련 기사는 <<삼국사기>>에도 수없이 나타난다. <<삼국사기>> 신라본기는 혁거세 8년(서기전 50)부터 소지왕 19년(497)까지 대략 550여 년 동안 49회에 걸쳐서 왜에 관해 기록하고 있느넫, 그중 33회가 왜의 신라 침략 기사이다. 그후 약 160년 동안 왜 기사는 보이지 않다가 백제가 멸망한 문무왕 5년(665) 에야 다시 나타난다.
백제본기에는 왜 관련 기사가 아신왕 6년(397)에 처음 등장하여 비유왕 2년(428)까지 7회에 걸쳐 나온다. 그후 180년 동안 보이지 않다가 무왕 9년(608)에 다시 나타나서 의자왕 때에 두 번 보인다.
백제 비유오아 2년(428)과 신라 소지왕 19년(497) 이후 왜 관련 기사가 <<삼국사기>>에서 오랫동안 사라지는 것은 이 무렵, 즉 5세기경에 왜의 주도세력이 한반도를 또나 일본열도로 들어간 사정을 보여주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합리적일 것이다.
왜와 백제의 관계는 신라의 경우와 달리 우호적이었다. <<삼국사기>> 문무왕 5년의 기사는 백제 부흥군의 부여융이 항복 후 당나라와 화친을 맹세하는 글인데, "(백제의 전 임금이) 왜와 내통하여, 그들과 함께 포악한 행동으로 신라를 침략하여 성읍을 약탈하니, 편안한 해가 거의 없었다"라고 하여 왜가 백제와 함께 신라를 침범하는 상황을 보여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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