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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질랜드 생활/Diary of Jung

신체발부 수지부모 불감훼상 효지시야 : 시크교(Sikh)

by 뉴질랜드고구마 2013. 6. 17.

身體髮膚 受之父母니 不敢毁傷이 孝之始也


몸과 터럭과 살은 부모에게서 받은 것이다.

부모에게서 물려 받은 몸을 소중히 여기는 것이 효도의 시작이다. <효경孝經>에 실린 공자 말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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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 알게 된 친구는 일명 '터번맨'입니다.

머리에 터번을 감고 있고 콧수염과 구렛나루, 턱수염을 숲풀 상대로 유지하고 있는 인디안이죠.

어느 인종이나 착한놈 안착한놈이 있듯이 내게 인디안도 그렇습니다.

그런 인디안 중에서도 선입관을 가지고 착하게 보는 친구들이 있으니 '터번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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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이헤케 섬에 있는 카운트다운에 가끔 스페셜청소를 하러 들어가곤 했습니다.

여기 카운트다운도 여느 카운트다운처럼 대부분의 나이트필러(물건 진열하는 직원)들은 백이면 백 인디안입니다. 

내가 하는 일이라는게 나이트필러들과 부디칠 일은 거의 없습니다. 

서로 약간의 양해를 구하며 자기 할 일만 끝내면 되는 그런 관계입니다.

근데 와이헤케 나이트필러들은 좀 질이 달랐습니다. 좀 더 지저분했고, 매너도 좋지 않았고, 심지어 내가 일을 제데로 할 수 없게 일정하게 텃세까지 부리는 것이였습니다.

그래도 어쨋든 일을 마쳐가는 와중에 나이트필러중에 한명이 슬쩍슬쩍 쓰레기도 치워주고, 내가 기계를 움직일 때 잘 비켜주고, 미안하다는 말도 몇번이나 하는 것이였습니다.  그 놈 참 착하네..

 

몇일 후 

인디안 'Mahen'과 이야기를 나누던 중에 와이헤케 매장에서 있었던 일과 친절했던 인디안에 대해서 대화가 오갔습니다. 그 이야기를 듣고 Mahen이 '혹시 터번을 쓰고 있지 않더냐?'라고 묻는 것이였습니다.

그렇다고 했더니 Mahen이 터번맨에 대해서 대략 이야기를 해줍니다.


'터번을 쓴 인디안들은 신과 함께 다니는 사람들이고 친절하며 믿음직 스럽다'는 것이였습니다.

기억을 되 돌려 보니 수없이 만났던 인디안중에 터번맨들이 몇명 있었고 좀 친절했다는게 떠오르는 것 같기도 했습니다.

... ...


몇일 전에 만난 이 친구 첫인상은 

딱 '윤두서' 국사교과서에서 봤던 조선시대 화가이십니다.


몇일 개인적인 이야기는 거의 안하고 일만 시켜봅니다. 

다른 인디안과 좀 다르게 거짓말 안하려고 하고, 농땡이 안부리려 하고 나름대로 성실합니다. 어제 일 끝나고 학교까지 픽업을 해주면서 차에서 여러가지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내가 종교적인 이유에서 터번을 하는것이냐고 물어보니 자기는 '시크교도'라고 합니다.

인도 전체인구중에서 2% 정도 차지하고 있답니다.

터번은 왜 하는가 물어봣더니 종교적으로 머리카락이나 여타의 터럭을 자르지 않는다고 한는데, 이것을 보호(?) 하기 위해서 터번을 머리에 두른다고 하네요.

자세히 보니 일 할 때는 검은색으로 머리에 딱 달라붙는 빵모자 같은 터번을 썻더니,

학교갈 때가 되니 흑갈색으로 볼록하니 멋스럽게 말아올린 모양입니다.

요건 따로 칼라를 정해서 써야 하느냐고 물어보니, 그렇지 않고 개인의 취향에 맞게 쓴다고 합니다.



내가 마지막으로 몇마디 던지 말에는..

너희 터럭을 자르지 않는것을 보니 우리나라도 100년 전쯤에는 터럭을 자르는것을 금기시 했었다.

우리는 그것을 부모에 대한 공경의 표현이라고 생각했다라고 이야기 해줍니다.

내 말을 제대로 이해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ㅎㅎㅎ



대화를 나누는 내내 내 머릿속에는 

뉴스에서 간간히 듣고 읽었던 '시크교'라는 단어가 뱅뱅 거립니다. 

왠지 테러와 전쟁과 깊은 연관이 있었던 단어 같은데 말입니다.

집에 돌아와 검색을 좀 해봅니다.

깊이는 아니지만 이해되는 부분이 많습니다.



다음에 만나면 허리춤에 칼 차고 다니냐고 물어봐야겠습니다. 


... ...


[시크교]


시크교는 15세기 인도 북부에서 힌두교와 이슬람교가 융합돼 탄생했다. 전 세계적으로 2300만명 정도의 신자를 거느린 세계 5대 종교이다.


힌두교의 신애(信愛:바크티)신앙과 이슬람교의 신비사상(神秘思想)을 융합한 것으로 인도 서북부의 펀자브 지방에 퍼졌다. 교조(敎祖) 나나크는 펀자브의 라호르 주변에서 태어나 인도를 여행하면서 많은 성자(聖者)들을 만났는데, 특히 바크티의 성자 카비르(1425~92?)에게서 큰 영향을 받았다.


  시크란 단어는 팔리어인 시카에서 왔으며 산스크리트어인 쉬쉬야에서 왔다. 쉬쉬야라는 의미는 제자, 사도를 의미하는 것이다. 시크는 나낙으로부터 시작하여 고빈드씽에 이르는 10명의 구루들의 제자들이다. 나낙은 기도와 명상을 통해서 그의 두가지 종교인 힌두이즘과 이슬람에대한 공부는 그에게 자신들이 보편적으로 많은 것을 가졌음을 그에게 보여줬다. 그는 국가가 필요한 것은 두 종교를 믿는 사람들이 서로간에 더욱 가까워 지도록 만들 수 있는 어떤 사람이다라고 굳게 믿었다.


  나낙의 종교는 노동윤리에 기본하고 있는 유일신관 이며 가난한 이들과 자신의 수입을 나누는것 그리고 신의 이름을 취하는것 등을 강조했다. 그는 AD 15 세기에 이땅에 왔으며 그 당시에는 배우진 못했으나 순박한 많은 사람들이 종교적 행위에 참여하고 있었으며 소위 그 당시에 종교 선생들로 불리던 자들은 자신들의 욕구와 자신들의 지갑을 채우기 위해 여러가지 이야기들이나 제사 의식, 신상들을 만들어 냈으며 심지어는 신을 만들어 내기까지 했다. 이런 모든것들이 결국은 성직계급에 있는 사람들을 만족시켜 줬으며 이윤을 갖도록 만들었다. 종교적인 신화 그리고 기적의 내용들이 암송되어졌으며 이러한 내용들을 부인하거나 도전하는 사람들은 신의 무서운 처벌의 공포에 직면하게 되었다. 사실 모든 종교적인 행위들이나 제사 행위들이 신과는 무관한 것이었다.


  이때 구루나낙은 창조자에 의해 영감을 받은 메신져로서 그의 주요한 메세지는 신의 이름과 우주의 모든것과 모든 사람들은 신의 질서에 의해 자신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는 사실을 늘 기억하라는 것이 었다. 아무도 그 어떤 무엇도 신의 질서와 통치의 실제에서 벗어나게 될수 없다. 그는 특히 괴로움과 슬픔으로부터 구원을 가져다 주는 그리고 위안과 안식을 주는 신의 이름을 묵상하라는 것을 늘 강조 하였다. 그는 역시 땅의 소산물에 대한 분배를 가르쳤으며 부정직과 불성실을 버리는 삶을 살라고 가르쳤다. 그는 인간은 신을 잊어버리지 않으므로써 삶에 있어서 매일의 일상안에서 기쁨을 맛보아야만 한다고 말했다.


  또한 매우 분명하게도 어떠한 정신적인 소산물도 신화적인 이야기에 집착하거나 혹은 다양한 여러 신들로부터 초자연적인 힘을 추구하는 것으로 인해서 찾게 될수 없다는 것을 지적했었다. 구루나낙은 신이 특별한 어떤 종교를 후원하고 있다라는 주장에는 어떠한 진실도 없음을 말했으며 신의 입장에서는 모든 인간은 동등하다는 것을 역설했다. 본래 나낙은 지금의 펀잡지방에서 힌두교도로 태어났으며 산스크리트어와 페르시아어,그리고 아라비아어를 배웠으며 힌두교와 이슬람의 수피교의 영향을 받으며 성장하게 되었으며 여러 성인들의 가르침을 흡수할 수가 있었다. 그의 주요한 가르침의 시작은 다음과 같다."여기에는 힌두교도도 , 무슬림도 없다. 오직 창조자이자 모든 원인중의 원인인 하나의 존재가 있을뿐. 그것이 바로 신이다."나낙은 그의 가르침을 펼치기 위해 인도를 거쳐 메카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스리랑카에 이르기까지 순례의 길을 다녔으며 수많은 이들이 그의 제자가 되었다. 그의 뒤를 이어 아홉명의 구루가 뒤를 이어갔다.그는 공동체의 지도자로서(Sangat) 찬가를 부르는 역할로서(Keertan) 그리고 함께 빵을 떼는 역할로서의(Guru Ka Langar) 구루의 신분을 강조했다. 그의 9명의 계승자들은 그의 스승의 가르침을 자신들의 언어와 자신들이 문학을 가지고 공동체에 전달하였다.


  본래 시크교에서는 신이란 형체가 없는 존재라고 믿었기에 우상이나 신의 형상을 숭배하는 일은 없으나 제5대 구루인 아르준(1581-1606)이 편찬한 <구루 그란트 사히브 - 스승의 책>라는 경전을 신성시 여기고 있다. 아르준의 아버지 구루 람다스(1574-1581)는 시크교의 도시인 암릿차르(생명수)를 건설했으며 그가 이름 붙인 신주의 연못이라는 의미의 암릿차르라는 커다란 탱크를 가지고 있었으며 그는 그 주변에 도시를 건설하기 시작했다.그도시의 한가운데에 있는 치료의 효과가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 암리트라는 샘주변에 아르준이 지은 사원이 바로 하르만디르 사히브 사원이다. 이사원의 모든 문은 개방되어 있으며 후에 영국인들이 이 사원의 돔형의 지붕에 덮여 있는 순금을 보고 이것을 골든 템플이라고 불렀다. 아르준은 이사원을 짓고나서 구루 그란트 사히브경전을 안에 안치해 놓고 얼마후에 자항기르에 의하여 처형을 당하고 만다. 6대 구루 아르준의 아들 구루 하르고빈드(1606-1645)는 아버지의 복수를 맹세하며 두자루의 칼을 차고 다녔으며 한자루는 복수를 다른 것은 그의 권표로서의 상징을 가졌다. 하르고빈드는 황금템플의 맞은편에 불의 신을 위한 탑을 세웠으며 7대구루때부터 군사력을 갖추는 데 힘을 쏟기 시작했다.


  9대구루인 테그 바하두르(1664-1675)역시 델리로 끌려가서 무굴의 왕인 아우랑제브에 의하여 처형을 당했으며 그이유는 이슬람으로의 개종을 완강히 거부했기 때문이었다. 그의 죽음으로 마지막으로 구루의 자리에 오른 아들 고빈드(1675-1708)는 30년이상을 무굴제국과의 싸움에 몸담았으며 시크공동체를 칼사(순수의 군대)로 불렀으며 스스로를 싱(사자)이라 자처했고 용맹한 시크교들에게 사자라는 칭호를 하사하기도 했다. 또한 구루 고빈드 씽은 시크의 군대 칼사가 쉽게 동료를 알아보도록 하여 자신들의 적과 효과적으로 구분해내도록 하기 위해서 시크교를 상징하는 다섯가지 용모를 갖추도록 지시했으며 그것은 다음과 같다. 긴머리, 머리빗, 단도, 오른손목에 차는 금속팔찌, 그리고 짧은 바지등이 그 복장이다. 1699년에 고빈드 씽은 아난드 푸르에서 최초로 다섯 시크에게 세례를 베풀었으며 신앙을 다짐하기 위해 매년 봄에 축제를 갖도록 지시했다. 그것은 지금도 이루어지고 있으며 아난드 푸르는 후에 시크교에게 중요한 의미를 갖는 지역으로 변모하게 되었다.마지막으로 구루 고빈드씽은 살아있는 구루의 계승을 중지할 것을 명령했으며 이것은 자신의 아들들이 이미 전쟁에서 사망한 이유도 있겠지만 모든 시크교인들을 어떠한 지역에서든지 뭉치도록 하는데 그 주요한 이유가 있다고 하겠다. 모든 시크교인들이 다섯명 이상만 그란트 사히브 경전앞에 있으면 구르를 정할 수 있도록 하는 것으로 이러므로써 지역적으로 멀리 있는 시크교도들도 자신들의 공동체를 스스로 운영할 수 있도록 하는것이다. 10명의 구루중 마지막인 고빈드씽은 시크교 신앙에 마지막 계명을 내렸다. 그는 그랜트사힙과 연관된 찬가를 만들었으며 시크들이 그책을 그들의 지침서로서 성스러운 책으로 존경해야만 한다고 선포했다.지금은 시크교도들이 머리에 터번을 두름으로써 쉽게 구분될 수 있으나 그 터번으로 인하여 수 많은 시크교인들이 죽음을 당했다는 것도 또한 웃지못할 사실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1984년 10월 초순의 오후 인디라 간디 암살의 주모자 둘이 바로 시크 경호원이라는 것이 밝혀 지면서 순식간에 델리전역이 폭동과 살해 현장으로 변모했으며 주로 힌두인들에 의한 시크교도들의 죽음이 이 사건의 전모였으며 이 폭동은 연장 3일이상을 지속됬으며 델리를 비롯한 인도전역에서 3일이 지난후에야 진정국면에 들어갔었다. 이때 머리에 터번을 두르고 있는 시크인들이 델리에서만 몇 천명 이상이 거리에서 혹은 집에서 죽임을 당했으며 이 폭동을 피하고자 했던 많은 시크들이 이때 머리를 자르고 터번을 벗어 던짐으로 자신의 목숨을 구할 수가 있었다. 이후로는 젊은 층을 주축으로 해서 자신들의 전통 복식인 이 터번을 벗어 던지는 경향이 늘고 있으며 수염이나 머리를 기르지 않는 사람들이 늘어나게 되었으며 지금은 갈수록 그런 경향을 띄고 있는 많은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으며 오직 그들의 사원인 구르드 와라에 들어가서 기도 할 때만 터번을 쓴다든지 아니면 머리에 수건을 두르고 들어가는 젊은이들이 구르드 와라 주변에서 많이 볼 수가 있다. 젊은 층에서는 이 터번이 거추장스럽고 용모를 추하게 만든다고 보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시크인들이 머리에 두르는 터번의 형식은 대개 3가지정도가 있는데 어린시절에는 대개 머리전체를 천으로 감싸서 머리 앞에서 하나로 모아 원구를 만드는 방법이 있고 , 전형적인 전통스타일로 천으로 머리전체를 몇 바퀴를 돌려서 만드는 방법이 있고 , 간단하게 천으로 머리를 한번 두르는 방법이 있다.


  란지트씽은 시크교 세속역사에 있어서 가장 유명한 인물이다. 그는 라호르와 암릿차르를 점령하였으며 하리 만디르를 대리석으로 재건축하였고 금박으로 하리 만디르의 원형돔을 칠했다. 그래서 그 템플의 이름이 골든 템플로 불려지는 것이다. 시크템플은 구루드와라-구루의 출입문-로 알려져 있으며 한때는 다람살라-신앙의 장소-로 알려졌기도 하다. 시크교인들이 공동체를 이루는 곳에는 언제든지 그들은 먼저 구루드와라를 건설 한다. 따라서 전 인디아와 해외에 이르기까지 수천의 구루드와라가 존재하고 있다. 일본, 홍콩, 필리핀, 태국, 싱가포르,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동아프리카, 영국, 캐나다, 미국 등지에 많은 구루드와라가 존재하고 있다. 구루고빈드씽과 관련된 4개의 구루드와라들이 특별히 신성한곳으로 간주되었다. 그것은 4개의 탁트-구루의 권좌-로 알려져 있다. 처음의 것은 구루고빈드씽이 태어난 빠트나에 있으며 2번째 것은 첫 침례의식이 거행되었던 아난드푸르에 있으며 3번째 것은 암니차르의 골든 템플에 있는 아칼탁트-영원의 권좌-에 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4번째 것은 구루고빈드씽이 죽은 하이데라바드에 있는 난디드에 있다. 위의 4군데의 구루드와라는 시크교인들이 성지 순례를 가는 역사적인 장소들이다. 모든 시크교 남성들은 씽이라는 이름을 갖게 되며, 모든 여성 시크교인들은 카우르라는 이름을 갖게 된다. 하지만 모든 씨크교인들이 씽 혹은 카우르라는 이름을 가짐에도 불구하고 모든 씽이나 카우르라는 이름이 시크교인은 아니다. 씽이라는 단어는 사자를 의미하며 그것의상대 암컷 이름이 카우르 이다. 카우르라는 이름은 공주 그리고 암컷사자라는 두가지의 의미를 갖고 있다. 이 두 이름은 대부분의 힌두인에게 있어서 일반적인 이름이다. 모든 시크를 씽 혹은 카우르라는 이름으로 만드는데 있어서 구루의 목적은 모든 씨크들이 계급 없는 하나의 형제집단으로 만들어지길 바랬던것이다.


  지금은 시크들이 그들의 고향의 절반을 파키스탄으로 잃어버렸음에도 불구 하고 그들은 그들의 그러한 재앙으로 부터 빨리 회복 되었다. 그들의 인도 전역으로 퍼져나갔으며 수천의 시크인들이 주로 중동과 영국, 캐나다등으로 이주해 갔다. 국내적으로 시크인들은 상위계층으로 부상하고 있으며 특별히 공군의 원수, 재무부 장관, 인디아 공화국의 대통령까지도 지내기도 했다. 누군가에게 세계에서 시크교인이 얼마나 되냐고 물어본다면 아마 그는 1억 5천만쯤 된다고 답할 것이다. 대부분의 그들은 파키스탄과 국경을 이루고 있는 인디아의 북서 국경지대에 위치하고 있는 푼잡 지역에 집중되어 있다. 시크교인들은 실제의 그들의 숫자보다 더 많아 보인다. 왜냐하면 그들의 뚜렷한 용모 때문이기도 하다. 모든 어른 남성들은 터본을 착용하고 턱수염을 기른다.  실제로 그들은 인도 인구의 2%이하를 형성하고 있으나 인디아 전역에서 그들을 볼 수가 있다. 최북단 카시미르에서 최남단 깐야꾸마리 그리고 서쪽 해안 항구 뭄바이에서 가장 동쪽 정글인 마니푸르에 이르기 까지 택시나 트럭을 운전하고 있는 시크교인들을 발견할 수 있다. 또한 그들은 전 인도에 상점 주인, 무역상인, 학자, 변호사, 의사, 공무원 등의 직종에 두루 퍼져 있으나 그들의 가장 많은 직업군을 형성하고 있는 것은 그들의 고향인 푼잡이 아니라 인디아의 수도인 델리이다. 시크교인들의 가장 많이 몸담고 있는 직업은 농업이고, 그 다음으로는 군인이다. 한때 영국의 인도 용병의 약 1/4에 달하는 숫자가 시크교인들 이었다.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유니폼을 입고 있는 군인중에 한명이 시크교인 이다.


   유명한 시크 역사 학자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한명의 시크가 있는 곳에는 한명의 시크가 있고 두명의 시크가 있는 곳에는 성자의 무리가 있고 다섯명의 시크가 있는 곳에 신이 있다. 시크가 아는 유일한 컬쳐는 에그리컬쳐이다. 시크는 인도에서의 가장 뛰어난 농업인들로 알려져 있다. 다른 어떤 누구보다도 인도에 녹색혁명을 가져 왔으며 인도에서 가장 부유한 농부이기도 하다. 에베레스트 산을 오른 9명의 인도인 가운데 3명이 시크이며, 인도 육상의 1/3이상의 수가 시크교인이다.


  현재 시크교(900만)의 85%가 펀잡지방에서 살고 있으며 나머지는 델리등 다른 도시에 거주하고 있다. sangat와 langar라는 자신들 문화를 이루며 할당받은 영지에서 자치권을 인 정받고 있지만 정치적으로 그다지 큰 영향력을 발휘하지는 않는다  



[시크교도의 상징]





시크교도의 상징인 5Ks는 마지막 구루인 10대 구루 고빈드 싱Guru Gobind Singh에 의해서 의무화 되었다. 1699년 고빈드 싱은 시크교의 신년에 해당하는 바이사키Vaisakhi 축제에서 칼사Khalsa단을 발족시켜 시크교도들은 5가지의 외형적 상징물을 항시 착용하라고 요구하였다.


5Ks는 케스Kes-자르지 않은 머리캉가Kangha-머리 빗카차Kaccha-순결을 상징하는 하의카라Kara-헌신의 상징인 철제 팔찌키르판Kirpan-자기 방어와 명예불굴의 정신을 상징하는 검이 그것이다고빈드 싱은 시크교도가 성년식을 행하면서 정식으로 착용하게 되는 5Ks의 엄수와 행동규범을 강조하였다시크교도의 이런 모습은 외형적으로 힌두교도와 무슬림과 구분되는 계기가 되었다.


여기에 덧붙여 고비드 싱은 칼사 시크 남성에게는 싱Singh을 여성에게는 코르Kaur라는 공통의 성을 부여하였다그러므로 시크교도는 5Ks와 함께 이름에서도 힌두교도와 무슬림과 구분되었다인도의 7대 대통령인 지아니 잘리 싱Giani Zail Singh은 이름에서 보듯 시크교도이다. 싱이나 코르는 모두 사자를 뜻한다싱은 숫사자이고 코르는 암사자이다이외에 고빈드 싱은 힌두교의 화신化身avatar, 카스트 제도브라만적인 의례가 부적절한 것으로 규정하였다그리고 무슬림의 잡은 짐승의 피를 빼내는 할랄halal, 여성의 얼굴을 가리는 파르다pardha 관습을 금지함으로서 무슬림과도 구분 지었다할랄은 "허용된"이라는 뜻으로 이슬람법인 샤리아에 허용된 항목을 뜻하는 말로주로 이슬람법상 먹을 수 있는 것을 말한다반대로 금지되어 있는 것은 하람-금지된-이라고 한다.


고빈드 싱이 칼사를 제도화 한 것은 시크를 타 종교와 구분짓고 시크 만의 정체성을 확립하기 위한 것이었다이러한 고빈드 싱의 노력으로 시크교도로서의 의식이 고양高揚되었다

구루 고빈드 싱이 위대한 점은 칼사 입문식을 거친 후 5Ks가 의무적으로 요구되는 아므리트다리amuritdhari와 그렇지 않은 사하즈다리sahajdhari 모두에게 칼사라는 용어를 사용함으로서 사실상 시크의 모든 제자들에게 칼사라는 용어를 적용하였던 것이다

고빈드 싱이 그렇게 한 것은 5Ks를 지키지 않는 사하즈다리 가운데서도 뛰어난 시크가 있었기에 그렇게 한 것으로 보인다이런 포용에도 불구하고 고빈드 싱이 외형적인 상징물을 시크교도들에게 적용하는 칼사를 제도화 한 것은 시크의 생존 차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게 된다타인과 구분되고 다르다는 것은 자신들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타 종교와 구분짓는데 큰 역할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시크의 발상지인 인도 북부의 펀자브 지방은 타 세력이 인도로 들어오는 관문과 같은 곳이었다그러므로 이런 지방에서 발흥한 시크교로서는 자신들의 자위 차원에서도 칼사를 제도화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칼사란 시크공동체를 말하는 것으로 순수의 군대란 의미이다.

[참고웹사이트 : http://valley.egloos.com/viewer/?url=http://dohyosae.egloos.com/425768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