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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질랜드 생활/Diary of Jung

Old tree reveals roots, branches (로열 웨딩을 통해 본 영국의 계급문화)

by 뉴질랜드고구마 2012. 9. 10.

신문을 읽다보니 외국에서는 보기 어려운 그림이 하나 눈에 들어옵니다.

자세히 들여다 보니 

한국에서는 쉽게 볼 수 있는 '가계도, 족보' 비슷한 그림입니다.

영국에서 뉴질랜드로 오래전에 이주한 한 가족과 관련된 내용입니다.


'가계, 혈통'에 대한 개념이 상대적으로 약한 서양문화권에서 살다보니

한국에서라면 뉴스꺼리가 못되는 것들이 여기서는 제법 재미있는 이야기가 되나 봅니다.



Old tree reveals roots, branches


The jigsaw puzzle of a 500-year-old family tree found in a Waiheke attic has been completed - almost. one piece is missing.



Margaret Keiller (nee Jennings), a 91-year-old from Hawkes Bay, has told The Aucklander her second husband, Dick Keiller, drew up the Jennings family tree in the 1960s.


The saga began when a Waiheke resident found an old document in an attic and sent it to a local librarian, who passed it to Auckland Libraries' family history team. It restored damaged sections then asked for public help to find a descendant of the family. The Aucklander published the story on its website and Mrs Keiller's was one of the many calls librarian Seonaid Lewis got from around the country.


Mrs Keiller says her husband emigrated to New Zealand from England in the late 1920s and married her in 1963 after both were widowed. They lived on the North Shore for 30 years until Mr Keiller's death in 1981.


[Margaret Keiller with her great-granddaughter Charlotte.]


Mr Keiller was a talented draughtsman keenly interested in family history.


"He felt cut off from his family in England so he started doing a family tree while his mum was in her late 90s. He went on to do other offshoots of his own family and mine."


Mrs Keiller's great-grandfather, David Jennings, was the first of the Jennings family to migrate to New Zealand. He arrived at Wakatu, Nelson, in 1849 and went on to have 10 children. By 1905 he had 50 direct descendants.


Mr Keiller was a member of the Auckland Genealogical Society and worked for Motor Specialties in Auckland as an expert on bearings. He compiled the document at home and in the Volkswagen draughting office.


"He used tracing paper, black ink and stencils on a large sloping draughtsman's board. Photos were glued on and mistakes had to be scraped out with a knife. It was a work of diligence. He was meticulous about doing everything correctly," explains Mrs Keiller.


Her husband retrieved information by writing to 10 branches of the Jennings family, and made copies for each group.


"There's so much interest now because of the chart Dick did and the research. They're all immensely grateful and ended up having a big reunion at my great-grandfather's house in Pangatotara, near Motueka, in 1999."


In 1968, Mr and Mrs Keiller went to England to visit Mr Keiller's dying mother. They also visited The Draper's Company, founded more than 500 years ago and which has links to the Jennings family. When Mr Keiller showed the assistant secretary his tree he was told: "We can go back further."


The couple were shown manuscripts that traced the Jennings family to 1400. Mr Keiller included the new information on the family tree.


Mrs Keiller, a former schoolteacher, says she's not sure how the family tree ended up in a Waiheke attic.


"During the early 2000s I moved to the island and hoped to build on my daughter Elisabeth's section, but the RMA [Resource Management Act] wouldn't let us. I gave up and moved to Hawkes Bay to be near my sister around 2006."


Before she left Waiheke she stayed with a friend at Bay Rd, Palm Beach, and used her garage to store items. "It's possible a cardboard tube fell out and got left behind. The house has passed through several families since."


Ms Lewis says unfortunately the details of the person who brought in the family tree were not recorded, but it's hoped they will come forward so the last piece of the jigsaw can be slotted into place.


"It'd be a satisfying conclusion," says Mrs Keiller.


기사원문 : http://www.theaucklander.co.nz/news/old-tree-reveals-roots-branches/1532646/


... ...


글을 읽던 김에 서양인, 그중에서도 영국인들이 생각하는 '혈통'에 대한 글을 검색해 봤습니다.

도움이 될 만한 내용이 있어서 스크랩해봅니다.


[체험분석] 로열 웨딩을 통해 본 영국의 계급문화

같은 공간의, 완전히 다른 세 공동체




⊙ 로열 웨딩은 국민을 하나로 묶는 고도의 상징조작
⊙ 非귀족은 이튼 등 사립학교 진학해도 사친회 행사 등에서 소외돼
⊙ 고교 졸업생의 5%만 대학진학, 하류층은 복지혜택 향유하며 현실 안주
⊙ 술집에도 계급 존재, 중산층 출입구는 bar, 하류층 출입구는 pub

張源宰 
⊙ 44세. 고려대 국문학과 졸업. 런던대 골드스미스 석사. 런던대 로열헐러웨이 연극학 박사.
⊙ 숭실대 문예창작학과 교수, 대한축구협회 기술위원 역임, MBC 라디오 <안녕하십니까 
    장원재입니다> 진행. 
⊙ 현 경기영어마을사무총장, 다문화콘텐츠협회 회장. 
⊙ 저서: 《오태석 연극: 실험과 도전의 40년》 《우리는 왜 축구에 열광하는가》 
    《유럽축구에 길을 묻다-한국 축구 산업화 방안》 《끝나지 않는 축구 이야기》.
영국 윌리엄 왕세손과 부인 캐서린 빈(嬪)이 2011년 4월 29일 결혼식을 마치고 버킹엄 궁전 2층 발코니에서 키스하고 있다.
  윌리엄 영국 왕세손(王世孫)이 결혼했다. 영국 전역이 떠들썩했다. 결혼 몇 주 전부터 길거리마다 국기(國旗)가 나부꼈고, 정원을 장식하거나 특별한 치장을 한 가정집도 부지기수였다. 왕실(王室)과는 아무 관계가 없는 사람들까지도 쉬지 않고 축하 파티를 조직하며 마음껏 기분을 냈다. 결혼식도 아니고, 퍼레이드를 보기 위해 길거리에 담요를 깔고 며칠씩 밤을 새워 가며 ‘좋은 자리’를 사수한 사람도 하나둘이 아니었다. TV로 로열 웨딩을 지켜본 다른 나라의 시청자들은 이러한 현상을 두고 두 가지 의문을 품었을 법하다. 영국인들은 왜 이 결혼에 이토록 열광하는가? 그리고 ‘21세기의 로열 웨딩’이란 일종의 시대착오적 행사는 혹시 아닐까?
  
  로열 웨딩 하면 떠오르는 첫 번째 이미지는 ‘호화로움’이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호사(豪奢)의 극치이면서도 품위와 장중함을 동반한 그림이다. 황금마차가 연이어 지나가고 각국의 왕족(王族)과 귀빈(貴賓)들이 하객(賀客)으로 참석한다. 하객 하나하나의 예복과 귀금속들은 평소에는 박물관에서나 볼 수 있는 물건들이다. 대성당 입구에서 하객들을 맞이하고 행사를 안내하는 사람들도 중세(中世)시절의 복장, 그리고 가발(wig)까지를 오롯이 갖춰 입은 시종(侍從)들이다. 화려한 색채에 바짓단이 풍성한 제복을 입은 나팔수들이 일제히 기립하여 팡파르를 울리는 것으로 예식을 시작한다.
  
  그렇다. 이 모든 것들은 기실 전(全) 세계 시청자들에게 매우 익숙한 이미지다. 왕자와 사랑에 빠지고 신분을 뛰어넘어 결혼에 골인하는 세계 공통의 이야기가 아닌가. 동화로부터 순정만화에 이르기까지, 시대와 지역을 막론하고 이처럼 널리 지지자를 확보하고 있는 줄거리도 흔하지 않다. 
  
  신데렐라와 콩쥐팥쥐는 피차간에 영향을 주고받은 스토리가 아니다. 각기 자연발생적으로 생겨나 대중의 사랑을 받은 동화다. 처녀의 ‘잃어버린 신발’이 귀인(貴人)과의 인연을 극적으로 이어 간다는 설정까지 같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2011년 상반기 최고의 히트 드라마 <시크릿 가든>도 변형된 신데렐라의 이야기가 아닐까?
  
  
  眞品과 유사품
  
  호화롭기로야 놀이공원의 퍼레이드가 훨씬 전문적이고 대중친화적이다. 온갖 첨단 기술을 동원한 영화 속 애니메이션 3D 웨딩은 또 어떤가. 
  
  영국의 로열 웨딩이 그렇게 특별한 이유가 별달리 있는가. 있다. 로열 웨딩은 ‘진짜(genuine)’다. 유사품이 아니다. 진짜가 빚어 내는 아우라(Aura)와 분위기는 모방이나 재현이 불가능하다는 특징을 지닌다. 
  
  이 문제를 두고 잠깐만 옆길로 새 보기로 하자. 소설가 김영하는 일찍이 우리나라 고궁(古宮)을 세계적인 관광지로 만드는 문제를 두고 ‘진정성’의 문제를 제기한 적이 있다. 덕수궁이나 창덕궁을 박제품(剝製品) 같은 문화재가 아닌 살아 있는 공간으로 재(再)창조하려면 뭐니뭐니해도 생명력을 불어넣어야 한다. 예컨대 왕궁(王宮)에는 왕족이 살아야 하는 것 아닌가. 그렇다고 왕정복고(王政復古)를 할 수는 없으니 왕손들이 주축이 된 사단법인 조선왕조를 결성하여 그들을 실제로 궁(宮)에서 살게 하자. 그리고 그들로 하여금 관광객들과 만나게 하는, 일종의 왕실의전(王室儀典)에 입각한 접견행사를 조직하면 어떤가. 
  
  심리학자 황상민 교수도 비슷한 맥락의 발언을 했다. 로스앤젤레스와 오사카의 유니버설 스튜디오는 시설이나 프로그램에는 거의 차이가 없다. 그러나 미국의 유원지는 세계적인 관광지고 일본 쪽은 적자(赤字)를 낸다. 이 차이는 어디에서 오는가. 간단하다. 미국에서는 실제로 영화를 찍고 일본에서는 영화를 찍지 않는다. 대중은 미국의 시설을 실제 영화 스튜디오로, 일본의 시설은 결국 모조품·유사품인 것으로 인식한다. 그 차이를 메울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이처럼, ‘진짜’와 ‘유사품’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강이 흐르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영국의 웨딩을 특별한 이벤트라고 부르는 이유다. 
  
  
  사람들이 ‘로열 웨딩’에 열광하는 이유
  
  그렇다면, 현실 세계에서 지구적 이벤트로 불릴 수 있는 행사는 어떤 것이 있는가. 딱 잘라 말해 영국 왕실의 대관식 장례식 결혼식을 뛰어넘는 행사는 없다. 왕실을 가진 다른 나라의 의식이나 여타 강대국의 국가행사, 예컨대 미국의 대통령 취임식에도 장중함과 위엄이 서려 있기는 하다. 
  
  그러나 영국 왕실의 행사에 비하면 동화적 환상(fairy tale fantasy)의 요소나 ‘진짜배기의 맛’이 다소 부족한 것이 사실이다. 전통(傳統) 때문이다. 영국 왕실의 행사는 현존하는 이벤트 가운데 가장 오랜 세월에 걸쳐 조금의 변화도 없이 지속되어 온 행사다. 바꾸어 말하면, 역사의 얼굴이 추상화된 모습을 털고 현실세계에서 모습을 보이는 이벤트라고 말할 수 있다. ‘역사와 문명이 축적’된 그 거대한 세월의 무게가 참가자들과 보는 사람들을 지그시 압박한다. 
  
  가장 최근의 대관식은 현(現) 여왕인 엘리자베스 2세의 1953년 대관식이며, 최근의 왕실 장례식으로는 다이애나 전 왕세자빈(王世子嬪)(1997년)과 퀸 마더(엘리자베스2세 여왕의 어머니 2001년)의 행사가 있었다. 하지만 대관식과 장례식에는 결혼식을 관통하는 ‘축제’의 이미지가 약하거나 없다. 
  
  ‘축제와 열광’이라는 기준으로 보자면, 이번 로열 웨딩에 필적하는 행사로는 1982년 찰스 왕세자와 다이애나의 결혼식을 꼽을 수 있다. 28년 만에 처음, 다시 말하면 한 세대에 한 번쯤밖에 없다는 희소성도 로열 웨딩의 축제성을 증폭시키는 요인 가운데 하나다. 
  
  왕세자 혹은 왕세손의 결혼식만 ‘로열 웨딩’으로 불리는 것은 아니다. 왕의 직계 존비속의 결혼은 으레 모두 로열 웨딩이라고 불린다. 이런 기준으로 보자면, 가장 최근의 로열 웨딩은 1999년 에드워드 왕자(엘리자베스 여왕의 3남)의 결혼식이다. 
  
  결혼식이 당사자들과 혼주(婚主)들의 사회적 자아(自我)를 확장하는 행사인 것은 동서고금(東西古今)이 다르지 않다. 그렇다면 재벌가나 명망가의 결혼식도 로열 웨딩의 분위기를 재현할 수 있을까? 아니다. 일단 ‘진짜’를 재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게다가 아무리 돈이 많더라도 거리를 가득 메울 만큼 군중을 동원하고 미디어의 주목을 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일반인의 결혼식 중 로열 웨딩 비슷하게 화제를 모았던 결혼식이 있기는 하다. 에드워드 왕자의 결혼식과 비슷한 시기에 거행된 데이비드 베컴과 빅토리아 베컴의 결혼식이다. 가장 유망한 축구선수와 인기가수라는, 평민들이 노력과 재능으로 다다를 수 있는 최정상에 다다른 두 사람의 결합은 당대 영국 사회의 최고 화제였다. 그래서 영국 언론은 이 결혼을 두고 로열 웨딩과 비교하는 의미에서 ‘People's Wedding’이라는 칭호를 붙였다. 
  
  
  로열 웨딩이라는 상징조작
  
윌리엄 왕세손과 캐서린 빈이 결혼식장인 웨스터민스터사원 입구의 무명용사 표지석을 돌아서 입장하고 있다.
  로열 웨딩이 수행하는 또 다른 기능들이 있다. 사회를 통합하고 국민들의 자긍심을 고취하며 ‘영국’이라는 나라의 이미지를 선양(宣揚)하는 것이 그것이다. 
  
  국가가 실체적 모습을 드러내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모든 사람은 물리적으로 체현된 국가의 몸을 느끼고 얼굴을 만져 보고 싶어한다. 개개인이 초라하고 보잘것없는 시민일망정 장중하고 굳건한 국가의 실체를 내 손으로 직접 느끼고 싶다는 소망을 품는 것이다. 
  
  종교에서도 이 점은 마찬가지다. 대중은 부호와 상징으로 표현되는 추상적인 신(神)이 아니라 조각이나 그림, 성직자의 몸으로 육화(肉化)된, 보다 우리의 시각과 청각에 다가서는 신의 모습을 원했다. 
  
  바로 이 지점에서 국가의 존재를 체험하게 해 주는 상징조작의 필요성이 대두된다. 그러한 상징조작 가운데 하나가 영국 현충일(顯忠日) 기념식이다. 영국 현충일 행진은 제1차 세계대전부터 6·25동란, 그리고 포클랜드 전쟁에 이르기까지, 영국군이 참전한 모든 전쟁의 참전용사들이 국왕과 더불어 거리 퍼레이드를 벌이는 장중한 행사다.
  
  퍼레이드의 종착점이자 기념식이 열리는 곳은 이번 로열 웨딩이 거행된 웨스트민스터 대사원인데, 사원에 입장하면서 보여주는 국가원수의 ‘사소한’ 행동 하나하나가 상징조작의 하이라이트다. 웨스트민스터 사원은 대관식을 비롯해 국가의 중요 공식 행사가 열리는 거점으로, 성당 내부에는 역대 영국 왕들과 위인(偉人)들의 묘소가 있다. 일종의 최상급 국립묘지이기도 한 셈이다. 
  
  문제는 사원 입구 중앙부 바닥에 ‘무명용사의 묘(墓)’라고 이름한 표지석이 있다는 사실이다. 국왕은 사원에 들어서서 직진하다가 무명용사의 묘에 참례한 뒤 표지석을 우회하여 ‘ㄷ’자 모양으로 걸음을 옮긴다. 다른 표지석을 밟고 지나는 것과 ‘무명용사의 묘’를 밟지 않고 우회하는 행동을 대비함으로써 나라를 위해 산화(散華)한 넋을 ‘국가’가 기린다는 점을 분명히 강조하고 지나가는 것이다. 
  
  상징조작이라면 9·11 테러 당시 보여주었던 영국 왕실 근위대의 퍼포먼스도 잊을 수 없다. 행진을 마치고 버킹엄궁 안에서 전날 근무팀과 교대하는 순간, 근위대는 미국 국가인 ‘성조기여 영원하라’를 연주했다. 전통과 관습을 뛰어넘는 사상 최초의 파격적인 배려였다. 다른 관광객들의 배려로 군중의 맨 앞줄까지 나아간 미국인들은 버킹엄궁의 철문을 붙들고 눈물을 흘리는 감동적인 장면이 전 세계로 송출되었다. 어쩌면 이 퍼포먼스는 가장 적은 비용으로 가장 많은 효과를 거둔 상징조작이 아니었을는지. 별도의 이벤트를 조직하지 않고 기존의 행사를 활용하면서도 사람들의 감성을 효과적으로 자극했다는 점에서 말이다. 
  
  
  계급사회 영국
  
  로열 웨딩이 갖는 긍정적인 측면에도 불구하고 이번 결혼식이, 나아가 왕실이라는 존재 자체가 시대착오적이라는 반론(反論)이 있을 수 있다. 무엇보다도 단 두 사람을 위해 국가가 그토록 많은 재화(財貨)와 용역(用役)을 동원하는 것이 정당한가 하는 비판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이 질문에 답하려면 영국의 사회계급이 지니는 의미와 역사성을 먼저 탐색해야 한다. 단언컨대, 외국인들은 영국 사회에 내장되어 있는 ‘계급사회’의 의미를 체득할 수 없다. 
  
  인도의 카스트제도처럼 표면적으로 드러나지는 않지만, 사회계급에 관한 영국인들의 관습과 감각은 일상생활의 세세한 모든 지점에 알알이 박혀 있다. 상류층(upper class) 중산층(middle class) 하류층(working class)의 차이는 어지간해서는 뛰어넘을 수 없는 신분의 벽이다. 
  
  민주주의의 발상지에서 어인 차별? 하지만 사실이다. 의회의 공식 명칭부터가 그렇다. 상원은 귀족원(House of Lord)이라 불리고 하원의 명칭은 평민회(House of Common)다. 하원의원은 선거를 통해 선출하지만 상원 의석의 상당수는 아직도 세습제다. 
  
  그렇다면 어떤 사람들이 상류층인가. 중산층은 누구인가. 
  
  거칠게 요약하면, 상류층은 영국의 왕족과 귀족들을 말한다. 귀족들은 공작(Duke)·후작(Marquess)·백작(Earl)·자작(Viscount)·남작(Baron)으로 나뉘는데, 이들은 기본적으로 무공(武功)을 세운 무인(武人)들의 후손이며 왕에게 하사(下賜)받은 봉토(封土)에서 나오는 임대수입으로 생활한다. 중산층은 전통적으로 농부·상공인·기술자들을 일컫는데, 현대에 와서는 전문직 종사자까지를 포괄한다. 하류층은 문자 그대로 노동자 계층이다. 
  
  
  영국적 은유
  
  계급의 표지는 직업을 통해서만 드러나는 것이 아니다. 언어, 의상, 음식, 교양, 문화생활, 즐기는 스포츠, 심지어는 정원의 형태나 애완동물을 통해서도 개개인의 계급을 유추(類推)할 수 있다. 
  
  예컨대 이런 식이다. 영국인들은 상대와 10분만 대화를 나눠 보면 그 사람의 교육과 교양정도, 그리고 출신 계급을 파악한다고 한다. 사투리를 가지고 출신지역을 파악한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수라, 진지, 밥 등으로 사용자의 신분에 따라 단어 자체가 달라지듯이 영어에는 계급에 따라 쓰는 표현이 다른 경우가 허다하다. 
  
  대표적인 예가 화장실. 하류층은 토일렛(toilet), 중산층은 워싱 룸(washing room) 혹은 레스트 룸(rest room), 상류층은 루(loo) 혹은 래버토리(lavatory)라는 말을 쓴다. 상류층 사이에서 토일렛이라는 말을 입에 담는 것은 우리 식으로 하자면 상견례 자리에서 “이 집 똥또깐이 어디냐?”고 큰 소리로 물은 것만큼이나 교양 없는 행위다. 결혼 전 왕실 파티에 초대받은 케이트 왕세손비의 어머니가 왕궁 집사들에게 “토일렛이 어디냐?”고 물었다가 귀족들 사이에서 ‘천격(賤格)’이라는 소문이 돌았다는 일화는 결코 과장이 아니다. 
  
  자신의 속마음을 직설적으로 표현하지 않고 에둘러 말하는 것을 ‘영국식 은유(euphemism)’라고 하는데, 귀족들과 중상류층(upper middle calss) 사이에서는 유페미즘의 구사 여부가 교양의 척도다. 
  
  그들은 화장실에 가고 싶다는 표현을 ‘자연의 부름이 있다(call for nature)’고 말한다. “당신의 지혜를 빌릴 수 있겠습니까?(Could I borrow your wisdom?)”라는 표현도 있다. 중산층의 표현으로는 ‘Step aside please’, 즉 길 좀 비켜 달라는 뜻이다. 
  
  이를 두고 1990년대 중반 학회에 참석한 어느 미국인 교수가 “영국에서는 직업여성들도 손님들의 계급에 따라 말이 달라지더라”라고 농담한 적이 있다. 중상류층이 주로 가는 호텔을 숙소로 사용했는데 심야에 접근한 여성이 던진 표현이 너무나 정중했다는 것이다. 그 교수는 미국에서는 대학원생도 “제가 혹시 귀하의 오늘 밤 수면을 도울 수 있을는지요?(May I have an opportunity to assist your sleep of the night, sir?)” 같은 표현을 하지 않는다고 했다. 
  
  
  보이지 않는 장벽
  
지난 1998년 11월 엘리자베스2세 여왕이 상원(上院)에 출석, 개원(開院)을 선언하고 있다.
  그렇다면 단어와 표현을 배우면 되는 일이 아닌가. 이것이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오죽하면 코벤트 가든 시장의 꽃 파는 처녀에게 말, 식사 에티켓, 예절, 행동거지, 걸음걸이 등을 가르쳐 귀부인으로 만든다는 <마이 페어 레이디>(1964년. 주연 오드리 헵번. 영화의 원작은 버나드 쇼의 <피그말리온>이라는 희곡)라는 영화가 나왔겠는가. 
  
  영국병(英國病)을 치유한 수상 마거릿 대처는 빵집 딸이고 대처의 후임자인 존 메이저는 곡예사 부부의 아들이다. 이러한 예외가 아주 없는 것은 아니지만 영국에서 신분을 뛰어넘는다는 것은 기적에 가까운 일이다. 
  
  일단 상류층, 중산층, 하류층이 가는 학교가 다르다. 영국의 교육제도상 초등학교 중등학교는 무상(無償)교육이다. 단, 공립(公立)학교에 한해서 그렇다. 상류층은 막대한 등록금을 내고 이튼스쿨이나 해로 같은 사립(私立)학교에 진학한다. 
  
  다섯 살 때부터 라틴어와 그리스어를 포함한 스파르타식 전방위(全方位) 고급 교양교육을 받은 어린이와 유년기와 청소년기 내내 자유방임형 교육을 받은 학생들이 성인이 된 후 동일선상에서 경쟁하는 일이 어떻게 가능하겠는가. 
  
  성적이 뛰어난 아동의 경우 사립학교에 진학할 수 있는 길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이튼의 경우, 중등과정에 한해 여왕이 장학금을 대는 퀸즈 스칼라십 장학생을 매년 12명씩 선발한다. 
  
  그러나 입학 다음이 문제다. 사립학교는 교사들과 학부모가 만나는 사친회(師親會)가 학사(學事)운영의 중요한 축을 담당한다. 문제는, 사친회가 열리는 장소와 공간이다. 자가용 요트를 몰고 지브롤터 해협에서 열리는 사친회, 집에서 기르는 말을 타고 사냥개 십여 마리를 동반해 참여하는 여우 사냥(Fox Hunting·무기를 일체 사용하지 않고 여우를 잡는 상류층의 연례행사) 사친회에 참석할 수 있는 비(非)귀족 학부형이 얼마나 되겠는가. 
  
  사친회에 참석할 수 있을 만큼 한재산을 일군 부모가 천신만고 끝에 자녀를 이튼에 보냈다고 문제가 모두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귀족들 사이에는 자기들끼리만 통하는 족보와 사교상(社交上)의 화제가 있다. 모파상의 <여자의 일생>을 보면 몰락한 귀족 둘이 만나 ‘본 적도 만난 적도 없는’ 다른 귀족들 이야기를 장황하게 이어 가는 대목이 있다. 그것이 귀족들의 일상이자 기본 교양이다. 
  
  이것은 하루 이틀 배운다고 습득할 수 있는 화제가 아니다. 특정 학교 출신 아닌 사람이 동창회에 참석해 느끼는 소외감을 떠올려 보시기를. 
  
  
  “워킹 클래스가 뭐하러 대학에…”
  
런던의 명물인 2층 버스는 알고 보면 영국 계급문화의 산물이다. 중산층은 1층, 하류층은 2층에 탑승했다.
  우리나라에도 특정직업의 배타성, 예컨대 의사, 변호사, 법관, 교직자들에게는 자신들만의 세계가 있다. 하지만 누구에게나 정해진 절차와 방식에 따라 그 세계로 진입할 수 있는 길이 열려 있다. 혈연에 기반한 개인의 출신성분에 얽매이는 것이 아니라 능력과 실력에 따라 얼마든지 신분상승이 가능하다는 이야기다. 
  
  하지만 영국은 다르다. 자신이 속한 계급의 코드(Code)와 다른 행동을 보이는 순간 주변으로부터 보이지 않는 제재(制裁)를 받는다는 점도 신분 이동에 나쁜 영향을 끼친다. 신분 이동을 하려면 장기간의 직업적 훈련이나 자기단련이 필요한데, 이 과정 내내 주변의 눈총을 견딘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닐 터이다. 
  
  지금은 사정이 많이 나아졌지만, 1960년대만 해도 영국 하류층은 대학에 갈 수 없었다. 필자의 영어 선생이던 봅은 아버지가 광부요 어머니가 하녀인 전형적인 위킹 클래스(Working Class) 출신이었다. 그가 대학에 진학할 당시 면접관들은 “온다니 뽑아는 주겠지만, 워킹 클래스가 무엇 때문에 대학을 오려고 하느냐. 어차피 중상류층 대학 졸업자들이 갈 수 있는 직장에서 직업을 구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라고 대놓고 말했다고 한다. 
  
  대학에 가는 것도, 진학 이후의 문화적 충격도 문제이던 시절, 하류층 영재(英才)들도 대학에 진학할 수 있어야 한다는 사회적 합의에 따라 1960년대 중반 설립된 대학이 에섹스 대학(University of Essex)이다. 
  
  대학 하나 세웠다고 수요가 충족이 되는가. 그렇다. 2011년 현재, 영국의 대학 진학률은 고등학교 졸업생 기준 5% 정도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대학 진학에 목매는 것은 중산층이다. 하류층과 마찬가지로, 상류층 역시 대학 진학을 크게 염두에 두지 않는다. 사립 고등학교의 커리큘럼은 어지간한 대학의 교육 내용을 뛰어넘는다. 정 필요하면 언제든 최상급 개인교사를 초빙할 수 있으니 굳이 대학에 갈 필요가 없는 것이다. 
  
  영국인들의 술집인 펍(pub)에도 계급이 존재한다. 중산층의 출입구는 바(bar), 하류층 출입구는 펍(pub)이라는 표시가 있고 2층은 중산층, 1층과 지하는 하류층의 공간이다. 
  
  지금은 모두 금연(禁煙)이지만, 1990년까지 이층버스는 일층이 금연석 이층이 흡연석이었다. 중산층은 1층, 하류층은 2층에 탑승했다는 뜻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엘리트 스포츠’라는 말을 쓴다. 생활체육과 반대되는 개념으로, 어려서부터 전업(專業)으로 운동하는 국제대회 출전용 선수들을 지칭하는 말이다. 
  
  영국에서는 뜻이 다르다. 상류층 스포츠가 엘리트 스포츠다. 마장마술(馬場馬術)과 말을 타고 하는 하키인 폴로(polo)가 전형적인 상류층 운동인데, 기본적으로 마리당 수억 원을 호가하는 초특급 우량마를 여러 마리 키울 수 없다면 이러한 스포츠를 즐기는 것은 불가능하다. 
  
  같은 구기(球技) 종목이라도 중상류층은 럭비를, 하류층은 축구를 한다. 테니스는 미들 클래스(Middle Class) 스포츠인데, 어퍼 미들 클래스(Upper Middle Class)는 같은 라켓 스포츠라도 스쿼시를 선호한다. 
  
  
  영국의 하류층은 신분 상승의 욕구가 없다
  
  그렇다면 영국의 하류층은 신분 상승의 욕구가 없다는 말인가. 놀랍게도, 답은 “그렇다” 이다. 
  
  그들은 체제에 안주하고 사회에 별다른 불만도 갖지 않는다. 개인적 이해관계 이외의 역사의식이나 사회의식도 별로 없다. 
  
  기초교육과 의료는 국가에서 책임을 져 주고 임대주택에 살면 주거비도 큰돈을 들이지 않고 해결이 가능하다. 노년 연금을 받으면 은퇴 후에도 최저생활을 이어 가는 데는 무리가 없다. 물론 사회보장 서비스의 품질은 기본사양 정도지만, 아등바등 살아도 어차피 신분을 뛰어넘기 힘들 바에야 죽어라고 노력을 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하류층은 귀족들을 ‘우리와 다르게 태어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필자가 영국에 살 때인 1992년 플라시도 도밍고의 야외 콘서트가 있었다. 공원 한편의 노천 공연장에서 진행되는 공연이었다. 큰맘 먹고 구입한 1등석 입장권에는 ‘반드시 한 시간 전에 입장을 완료해 달라’는 문구가 쓰여 있었다. 문제는 이 티켓이 진정한 의미에서의 ‘1등석’이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무대 앞에는 새끼줄로 둘러친 별도의 특등석이 마련되어 있었다. 귀족들은 공연 5분 전에 매 커플이 시종들의 안내를 받으며 우아하게 입장했다. 중간 휴식 시간에도 그들은 따로 움직였다. 별도의 텐트에서 담소를 나누었고 일반 관객들은 그들이 퇴장한 뒤에야 비로소 이석(離席)할 수 있었다. 
  
  10년(1991~2000년) 남짓의 영국생활 동안 살아 움직이는 귀족들을 눈앞에서 본 것은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그만큼 각 신분의 생활공간 자체가 다른 것이다. 사회학자들 사이에서는 그래서 영국을 ‘같은 공간 안에 존재하는, 완전히 다른 세 개의 공동체’라고 표현하는 사람들도 있다. 
  
  
  신석기시대 후손들이 아직도 근처에 살아
  
  그것이 영국인들이 이사를 가는 경우가 매우 드문 이유다. 거주지 자체가 집단 신분의 코드를 반영하고 있으므로 다른 신분의 사람들이 사는 곳으로 거주지를 옮긴다는 것은 여간해서는 엄두가 나지 않는 일인 것이다. 
  
  1990년대 초반 잉글랜드 북부의 탄광지대에서 석탄더미 속에 묻혀 있던 신석기(新石器)시대 자연 미이라가 발견된 일이 있다. ‘영국인들은 이사를 가지 않는다’는 속설(俗說)과 연구자들의 장난기가 겹쳐 인근 주민들의 DNA를 채취하여 미이라의 DNA와 비교하는 프로젝트가 진행되었다. 놀랍게도, 신석기 미이라의 후손은 여전히 인근 지역에 거주하고 있었다. 부인은 “남편이 유난히 덜 익힌 스테이크를 좋아하더라니, 그게 다 이유가 있었네요”라고 농담했고 당사자는 “누구에게나 신석기인 조상이 있다. 남들은 그것이 누구인지 모르고 나는 그것이 누구인지를 안다는 것이 차이일 뿐”라고 인터뷰했다. 
  
  생활을 위해 직업을 가져야 한다면 그것은 이미 상류층이 아니다. 생활고(生活苦)로부터 벗어나 있지만, 상류층은 상류층대로 자신들의 의무를 다한다. 일단 전쟁이 터지면 그들은 어김없이 입대한다. 그리고 “나는 최전방(最前方)에 설 권리가 있다”고 외치며 최전선으로 간다. 
  
  자선사업도 상류층의 의무 가운데 하나다. 우리나라 재벌가와 차이가 나는 점은 영국의 귀족들은 자신들의 개인 재산으로 자선을 펼친다는 점이다. 이러한 상류층의 행태를 영국인들은 진정한 의미에서의 노블레스 오블리주라고 인정한다. 
  
  
  평민 출신 왕세손비의 미래는?
  
  다시 로열 웨딩으로 돌아가 보자. 케이트 왕세손비는 영국 왕실 사상 최초의 평민(平民) 출신 왕비다. 윌리엄 왕세손과 연애를 시작한 이후 동거(同居)와 이별, 재결합을 반복하며 7년을 기다렸다. 평민 출신이 왕족과 결혼한 것도 사상 최초지만 왕족과 공공연하게 동거를 한 것도 그녀가 처음이다. 그래서 붙은 별명이 ‘기다리는 케이트(Waity Kate)’다. 
  
  케이트의 시어머니 다이애나는 가세(家勢)가 기울기는 했어도 백작의 자제였다. 유치원 보모 노릇을 한 것은 일종의 경험 쌓기였지 절실해서 한 일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다이애나는 왕궁의 차별과 멸시를 견디지 못했다. 물론 본인의 자유인 기질이 왕실의 까다로운 예법 및 관습과 충돌한 면도 있지만. 
  

  케이트는 어쨌거나 기약없는 기다림을 거듭하며 한 세월을 견뎠다. 일거수일투족이 언론의 주목을 받는 상태였으니 그 스트레스도 만만치는 않았으리라. 그 중압감과 불안감을 이겨 냈다면 케이트의 성품이나 자질은 평균을 훌쩍 뛰어넘는다고 보아야 마땅하다. 그러나 궁중 생활이 갖는 압박감은 겪어 보지 않고서는 알 수 없는 어마어마한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 케이트의 미래는 우려 반 기대 반이다. 왕세손과 왕세손비의 결혼을 축하한다.⊙


기사원문 : https://monthly.chosun.com/client/news/viw_contentA.asp?nNewsNumb=201106100050&ctcd=D&cPage=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