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질랜드 미나리
이 주 전에 아내가 김장하며 버무릴 때 넣는다고 사 왔던 미나리. 도마 위에 올려져 있던 걸 여섯 가닥 건져 냈습니다. 텃밭에 몇 뿌리 심고자 해서.
컵에 담아 주방 창가에 올려놓으니 금세 뿌리가 나오고 이제 땅에 묻어도 될 정도가 되었습니다. 따로 뿌리를 내리게 하지 않아도 심겨질 땅이 어느 정도 축축하기만 하면 살았을 테지만 성공률을 높이고 아이들 보여주기도 할 겸 뿌리를 길러 봤습니다.
이민 첫해에 집주인 허락을 밭아 뒷마당 잔디밭 한쪽을 걷어 내고 텃밭을 만들었습니다. 그 딱딱했던 진흙땅을 옥토로 만들기 위해 근처 말 농장에 가서 말똥을 여러 번 실어오고 일터였던 가구공장에서 톱밥 가져다가 뒤엄자리 만들어 거름을 만들었습니다. 그 일을 대여섯 번 반복하니 옥토가 되었습니다.
배추, 상추, 옥수수, 고구마, 호박, 오이, 부추, 취나물, 겨자상추, 쑥, 야콘 등 오클랜드 근방에서 구할 수 있는 거의 모든 텃밭 야채를 심어 먹을 수 있었습니다. 미나리도 있었습니다.
그때 미나리는 좋은 땅을 차지하지 못하고 텃밭과 이웃집 담장 사이에 있는 폭이 50cm에 5미터 정도 되는 배수로에 뿌리를 내렸는데 기세가 실로 대단했습니다.
다른 채소들은 모두 계절을 따라가야 했지만 미나리는 달랐습니다. 어느새 배수로 전체를 점령하고 텃밭 가장자리를 넘보기까지 하면서 사시사철 고향의 맛을 식탁에 올려줬습니다. 김장할 때는 기본이고 혼자 나물이 되기도 했고 시시때때로 낚시에 걸려오는 생선탕에 주재료가 되기도 했습니다. 물론 주변에 알고 있던 사람들에게 한 보따리씩 선물해서 그분들 식탁도 풍성했을 것입니다.
3년전 이 집으로 이사 왔던 해에 텃밭 만들 생각을 하면서 한국 커뮤니티에 미나리뿌리 주실 분 있으신가요? 글 올려서 하루 만에 한 봉지 얻어왔던 적이 있습니다. 미안스럽게 뭐가 그리 바빴던지 아무 땅에도 묻어 놓지 못하고 게라지 처마밑 바킷에 훌떡 가져온 봉지채 담아 놨습니다. 그러고 한 달 정도 푸릇 하다가 마르다가 푸릇하다가 마르다가를 반복하며 모든 뿌리가 죽어가는 걸 봤습니다.
여기서 미나리 영화 이야기를 안 할 수가 없습니다. 윤여정 연기를 보면서 감탄한 게 아니라 전체 스토리 자체가 어찌나 어이처구니가 없던지... 영화가 개봉된 후 국제적으로 한창 유명세를 떨치며 사람들 입에 오르내릴 때도 크게 관심을 갖지 않았습니다. 일 년쯤 후 어느 날 아내랑 같이 미나리 영화를 보면서 아내가 계속 내뱉던 한마디... '내 남편 정재이가 저기 있었구먼...'
영화를 보며 어처구니가 없었던 건 마치 내 이야기, 우리 가족 이야기를 보는 기분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심정적으로 싱크로율 500% 정도였습니다. 심정적으로... 나와 아내, 아이들, 어려운 시절 보내고 있는 자식들 보고 다녀가신 양가 어머니들...
10여 년 전이나 지금이나 나아진 건 별로 없으나 마음의 평안과 평안한 일상을 위로 삼습니다. 저 여섯 가닥 미나리는 곧 온 집안 빈터들에 뿌리를 내리며 우리 식탁을 고향의 맛으로 풍성하게 해 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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