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뉴질랜드 생활/다현, Daniel's

아버지의 아버지

by 뉴질랜드고구마 2009. 4. 6.

어제는 아버지 제삿날 이였습니다.

 

코 찔찔 흘리던 초등학교를 마치고 중학교에 들어가 적응을 시작하던 1986년 봄.

학교를 마치고 집에 돌아오니 어머니가 동네 아주머니와 함께 모판에 황토흙을 담고 계셨습니다.

아침에 언뜻, 아버지가 몸이 좀 많이 부으셔서 정읍에 있는 큰 병원에 진찰을 받으러 가신다는 말을 들었던 기억이 떠올랐습니다.

아버지가 여러 검사를 받으셔야 해서 병원에 입원하셨고 내일은 집에 오실거라며, 마당가득 쌓아놓은 모판에 흙을 열심히 담으셨습니다.

그렇게 하룻밤을 보냈습니다.

 

이른 아침 어머니는 아침식사준비를 하셨고, 작은 누나와 나는 학교에 가기 위한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부르릉 거리며 오토바이 한대가 집 마당으로 들어왔습니다. 빨간 오토바이, 우체부 아저씨였습니다.

 

그렇게 이른 아침에 우체부 아저씨를 본것은 생전 처음이였고, 생전 처음 보는 '전보 쪽지'를 어머니께 건네 주셨습니다.                   

 

                                                                                              [아버지 영정사진]

 

이십년이 더 지난 그날 아침 일은 어머니 숨소리 하나까지도 기억에 생생합니다.

그 순간 이후로 일어났던 일들은 또 기억에 없습니다.

 

마당에는 하얀 천막이 쳐졌고, 좁은 집안에 사람들이 북적였습니다.  

그럴려고 준비하셨던지 작년에 그려놓으신 멋스러운 사진을 3일정도 방안에서 내내 지켜봤던 기억이 납니다.

울다 졸다 문득문득 아버지 영정을 보면 언제나 시선은 나를 보고 있었던것 같습니다.

 

아버지가 울긋불긋 상여에 실려 논둑길을 건너 집 뒷편 언덕받이에 묻히시던 날도 생각이 납니다.

철없이 상여 앞으로 왔다갔다 하는 나를 보고,

먼 친척되시는 분이 '그러면 안된다 얌전해야지'라고 타이르시던 것만 또 생각이 납니다.

 

아버지는 우리집 샘가에서 내다보면 바로 보일만한 곳에 편히 잠드셨습니다.

마흔여섯.

내가 딱 9년만 더 살면 아버지가 돌아가시던 나이가 됩니다.

... ...

 

'술짱'이셨던 아버지가 최고로 생각이 났을때는

대학시절 데모꾼이 되었다가 미결수로 몇달 '콩밥'을 먹던 때였던것 같습니다.

질풍노도의 시절, 아버지가 계셨다면 내 인생이 조금 다른 방향이 아니었을까 싶었습니다.

농사꾼 이셨지만 삶에 대한 방향 정도는 설정해 주셨지 않을까

목표를 찾지 못하고 방황하던 내게 꾸지람이라도 던져주셨지 않을까

 

그 아버지 제삿날 이였습니다.

 

... ...

 

다현이는 최고의 컨디션을 보여줬습니다.

언제 내가 할머니와 친가 식구들에게 낯가림을 했냐는 듯, 할머니 등에 엎여 낮잠을 즐기기 까지 했습니다.

거실에 둘러앉은 어른들 가운데 앉아 까르르 웃음소리를 던질때는

가족들 모두 쓰러졌습니다. ^^;;

 

다현이도 할아버지가 보고 싶었나 봅니다. *^^*

 

                                      [아버지 산소 갔다가 삼태 마을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