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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폴 드 모졸 정신병원 전경. 원래는 12세기 성 아우구스티누스 수도회에서 세워 트리카스탱의 성자 폴에게 헌정한 수도원이다. 1800년대 생레미 의사 메르퀴랭이 수도원을 개조해 정신병원을 만들었고, 1차 세계대전 중에는 독일군의 생폴 수용소로 사용되었던 곳이다. 올리브나무와 소나무 실편백나무를 배경으로 로마네스크식의 아름다운 회랑을 갖춘 이 정신병원에서 빈센트는 자원해서 1889년 5월부터 1년간 입원해 있었다. Leica M6, ELMARIT-M 1:2.8 / 21mm PROVIA 100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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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에서 기차를 타고 북쪽으로 70km 정도 떨어진 오베르 쉬르 와즈 역에 도착하니 10월 하순의 저녁 회색 하늘에 찬바람이 몰려왔다. 오베르는 작은 마을이다. 우리네 단위로는 면소재지 정도의 작은 간이역에 한 시간에 한 번 정도 몇 칸의 객차를 연결한 기차가 다니는 그런 평범한 시골이다. 한때 인상파 화가인 피사로를 비롯, 세잔 등 화가들이 즐겨 화폭에 담던 곳으로 여름이면 들판의 개양귀비가 지천으로 피고 유월에는 밀밭의 노란색이 와즈강 건너 들판 위로 넘실대는 곳이다. 빈센트 반 고흐(Vincent Van Gogh 1853~1890)는 이 곳에서 생의 마지막 불꽃을 사르며 <까마귀가 나는 밀밭> <닥터 가쉐의 초상> 등 70여점의 유화작품을 완성하고 오베르 언덕 너머 끝없이 펼쳐진 7월의 노란색 밀밭에서 37년 짧은 생을 마감하였다.
빈센트는 네덜란드 작은 마을 준데르트에서 개신교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 목사가 꿈이었던 그는 성격 부조화로 전도와 설교를 버리고 화랑점원 일을 시작하지만 사랑의 실패와 아버지와의 불화로 젊은 생을 방황하다가 동생의 권유로 그의 나이 30이 되어서야 늦게 그림을 시작한다. 빈센트의 작품 활동 기간은 생의 마지막 7년으로 이 짧은 기간에 약 875점의 회화와 1100점의 데생을 남겼다. 정식 미술교육도 받지 않고 그림도 어려서 일찍 시작한 것도 아니건만 한 사람의 평범한 무명화가가 자기의 꿈과 열정을 우울증과 고난과 싸우며 이루어낸 실로 엄청난 결과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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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 레미 시가풍경. 전형적인 10월의 프로방스 날씨로 남불의 정취를 한껏 보인다. 시내라고 해도 걸어서 10분 정도밖에 안 되는 작은 곳이지만 구석구석 이탈리아 시골 같은 따듯함이 배어있다. Leica M6, ELMARIT-M 1:2.8 / 21mm PROVIA 100F |
오베르에서의 희망
빈센트는 1890년 5월 남불 생레미 생폴 드 모졸 정신병원에서 파리근교 오베르로 거처를 옮겼다. 생폴 드 모졸에서의 1년 동안 정신병원 생활은 발작과 열악한 환경으로 거의 지옥이었고, 간간히 정신이 온전히 들 때 그림을 그리는 순간이 가장 행복했다. 파리 시절부터 따뜻한 스프에 제대로 된 음식을 먹은 기억이 아득하고 대신 독한 싸구려 압셍트 술에 딱딱한 바게트로 허기를 달랬다. 치아는 거의 망가져 10개나 충치로 고생했고, 매달 테오가 보내주는 생활비는 물감 값과 방세를 지불하면 남는 게 없었다. 그래도 빈센트는 자기의 그림이 곧 팔릴 것이라는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하지만 그 희망은 빈센트 생전 단 한 점의 유화가 팔린 것 이외는 아무것도 없어 그를 죽는 순간까지 절망에 빠트렸다.
빈센트는 오베르의 한적한 시골풍경이 마음에 들었다. 정착한 다음날부터 일찍 화구를 챙겨 오베르 언덕을 오르는 골목풍경과 까마귀가 나는 교회 등을 스케치하고 잠자리 겸 화실인 카페 라부로 돌아와 열심히 캔버스에 유화를 그리기 시작했다. 튜브에 담긴 선명한 색채의 물감을 다른 색과 섞지 않고 그대로 사용한 빈센트의 그림은 그의 짧게 끊은 붓질과 함께 자신의 개성을 직접적이고 과감하게 내보이는 방식이었다. 빈센트는 그림 자체가 땀을 철철 흘리는 것처럼 캔버스 위에 거친 붓질로 빠르게 그려나갔고, 튜브에서 곧바로 짜내 바른 듯 두터운 물감의 흔적은 마치 화가가 바로 몇 초 전에 그 붓질을 완성 한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키게 하였다.
종이에 연필, 13.5x21Cm, 2008 오베르 언덕 시내가 바라보이는 곳에 자리한 빈센트와 테오의 무덤을 스케치 했다. 살아서 둘은 형제의 우애보다 더 진한 인연의 끈을 놓지 못하더니 죽어서도 아이비 넝쿨 한 이불속에 나란히 누워 있다.]>
빈센트의 고독
오베르역 가까이 대로변에 자리한 카페 라부의 이층 다락방은 아직도 빈센트의 온기가 고스란히 남아 있는 듯 내 마음이 뜨거워진다. 한 사람이 겨우 올라갈 만한 삐걱거리는 나무계단을 오르면 천장에 뚫어진 들창으로 희미한 빛줄기가 나무 바닥에 비추인다. 빈센트의 방은 서너 평도 채 안 되어 보이는 나무마루에 1인용 철제침대와 밀짚으로 엮은 나무의자 한 개와 오베르 읍내가 내다보이는 작은 들창 하나가 전부였다. 고흐가 그곳에서 가진 것이라고는 붓 몇 자루와 파레트, 물감 몇 개 그리고 캔버스와 작은 이젤 하나, 허름한 밀짚모자와 파이프 담배, 낡은 옷 몇 벌이 전부였다. 자신의 모진 삶은 바위보다 무거웠지만 가진 것은 새털보다 더 가벼웠다. 평생 가난과 고독을 벗하며 발작과 우울증으로 고통스럽게 살다가 생의 마지막 2개월을 이곳 오베르에서 미친 듯 그림을 그리고 별처럼 사라졌다.
“지난 삶의 기억들, 이별한 사람들이나 죽어버린 사람들, 영원히 지속될 것 같던 시끌벅적한 사건들... 모든 것이 마치 망원경을 통해 희미하게 바라보는 것처럼 기억 속으로 되돌아올 때가 있지요. 과거는 그런 식으로만 붙잡을 수 있는가 봅니다. 저는 계속 고독하게 살아갈 것 같습니다. 가장 사랑했던 사람들도 망원경을 통해 희미하게 바라보는 수밖에는 없습니다.”
1890년 6월 12일 오베르에서 자살하기 한 달 전, 빈센트가 어머니에게 보낸 편지 가운데 한 구절이다. 그는 죽는 순간까지 자신의 고독을 직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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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폴 드 모졸 정신병원의 안뜰. 고풍스러운 회랑으로 둘러친 안뜰에는 갖가지 꽃으로 정리된 갖추어진 화단이 정연하고, 벽으로 올라간 담쟁이에 가을이 진하게 내려앉았다. 고흐는 이곳과 오베르에서 자신의 걸작 대부분을 완성했다. Leica M6, ELMARIT-M 1:2.8 / 21mm PROVIA 100F |
빈센트의 죽음
1890년 7월 27일 빈센트는 오베르 언덕의 밀밭에서 심장을 향해 방아쇠를 당겼고 총알은 횡경막을 비껴 관통했다. 그의 자살시도 동기는 자세히 알 수 없지만, 파리에 있는 테오의 실직으로 더 이상 생활비와 화구를 살 비용을 마련할 수 없다는 절망감과 주기적으로 찾아오는 간질 발작이 언제 다시 시작될지 모르는 불안감으로 심각한 우울증에 빠졌던 것 같다. 그해 여름의 밀밭도 노란색으로 넘쳐나고 하늘엔 까마귀가 가득 날고 있었다. 사고 소식을 듣고 파리에 있던 동생 테오가 카페 라부에 도착했을 때 빈센트는 “너는 인간 세상에 이토록 슬픔이 가득하다는 것을 상상할 수 없을 거야”라고 말하였다. 테오는 형의 상처가 곧 나을 것이라고 믿었지만 패혈증으로 인한 열이 빈센트를 덮쳤고 그는 바로 의식을 잃었다. 그리고 이틀 뒤 빈센트는 눈을 감았다. 테오는 빈센트의 방을 해바라기로 장식하였고, 관 옆에는 그의 그림을 진열하였다.
7월 30일 조촐한 장례행렬이 따가운 햇살 아래 빈센트가 살아 생전 회화의 재발견을 이룩했던 들판을 가로질러 나아가고 있었다. 거기에는 파리 시절 빈센트에게 물감이며 화구를 대주던 화구상 탕기 할아버지도 있었고 닥터 가쉐와 화가 피사로도 있었다. 빈센트의 삶의 무게만큼 장례식도 무거웠다. 말없이 삶이 고통스럽게 마감되는 순간이었다.
빈센트의 죽음 후 몇 달이 지난 1891년 1월 12일 테오 역시 위트레흐트에서 형에 대한 연민과 회한으로 숨을 거둔다. 1914년 테오의 유해는 아내 요한나에 의해 오베르의 언덕 위 까마귀 나는 밀밭 공동묘지로 옮겨져 빈센트의 옆에 묻혔다. 빈센트와 테오의 무덤은 서로 떨어질 수 없는 담쟁이 넝쿨로 함께 덮였다.
빈센트는 아를에 있을 무렵 테오에게 다음과 같이 편지를 보냈다.
“아무리 육체와 정신이 부서져라 성실히 작업해서 작품을 완성했다 하더라도 화가도 결국 다른 사람과 마찬가지로 죽으면 묘지에 묻힌다. 단지 약간 다른 점이 있다면 진정한 화가의 경우, 그 작품이 후세에 영원히 회자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화가로서 최대의 과제는 죽음이 아니라 그런 작품을 제작하는 행위 자체일 것이다... 기차를 타고 타라스콩이나 루앙에 갈 수 있는 거라면 죽음을 타고는 하늘의 별에 갈 수 있을 텐데...”
빈센트에게 별들이 가득한 아름다운 하늘은 죽음의 세계이며 그곳에 도달하기 위한 “증기선이나 마차 혹은 기차 같은 교통수단으로...나이 들어 조용히 죽는 건 걸어가는 것과 같은 것”이라고 생각됐다.
빈센트의 죽음은 하늘에 있는 별을 향한 37년 동안의 고난과 창조, 사랑으로 충만한 궤적이었다. 그 짧은 궤적의 최후 7년 동안 그는 마치 하늘의 계시라도 받은 것처럼(모짜르트의 삶과 예술처럼) 후세에 길이 남는 무수한 작품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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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베르 교회 전경. 12세기에 지어진 교회로 1890년 6월 고흐가 죽기 두 달 전에 (오베르 교회)의 전경과 6월의 푸른 하늘을 빠른 붓질과 네덜란드 리모주에서 생산되는 청색으로 강렬하게 그려내었다. Leica M6 ELMARIT-M 1:2.8 / 21mm PROVIA 100F |
빈센트 그림의 명암
빈센트의 삶은 살아 생전 그렇게 갈망하던 화가로서의 자립과 가정의 독립을 이루지 못한 채 회한으로 점철됐다. 그의 그림이 팔린 이력을 보면 참으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빈센트가 화가 수업을 위해 네델란드의 헤이그에 머무를 무렵 예전에 그가 일했던 구필화랑의 헤이그 지점장이 소묘화 한 장을 10굴덴(약 5000원)에 샀고 헤이그의 풍경을 그린 작은 펜화 12점을 숙부가 30굴덴에 샀으나 그것은 결코 생계에 보탬이 되는 수입은 아니었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33세 때 파리에 있을 무렵 그는 식량을 구하기 위해 여러 장의 그림을 고물상에 헐값에 팔아 치웠고, 고물상은 그 그림들에 칠한 물감을 떼어내서 중고 캔버스로 만들어 팔았다고 한다.
빈센트가 친구들과 자주 다녔던 파리의 ‘카페 뒤 탕부랭’에서 그림 경매를 할 때 그의 그림은 10매 1세트에 50상팀(0.5프랑)밖에 되지 않았다. 당시 카페에서 마시는 커피 값이 0.25프랑이었으므로 그림 10장이 고작 커피 두잔 값에 팔린 셈이다.
만년에 아를에서 빈센트의 치료를 담당했던 의사 펠릭스 레이는 빈센트가 감사의 표시로 선물했던 그림을 끝내 거절하지 못하고 받긴 받았으나 그 밖의 그림은 모두 거절했다. 선물로 받은 그림은 잠시 펠릭스 레이의 집 다락방 창고에 보관되어 있었으나 곧이어 닭장의 여닫이문으로 쓰였다. 또한 빈센트가 정신병원에 입원했던 생레미의 의사 아들은 빈센트가 그곳을 떠나며 남긴 그림 몇 장을 친구와 사격 연습용 과녁으로 썼다고 한다.
하지만 빈센트의 그림은 죽기 전 서서히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고, 비평가들의 입에도 오르내렸다. 빈센트는 생전에 단 한 점 <아를의 붉은 포도밭>이 400프랑에 팔렸지만, 사후 한 세기가 지나서 세계 경매시장에서 그의 그림은 사상 최고가를 갱신하는 기염을 토한다.
1987년, 생레미 생폴 드 모솔 정신병원 정원에서 그린 <붓꽃>은 소더비 경매에서 3억2000만 프랑(약 768억 원)에 팔려 세계에서 가장 비싼 그림 값으로 기록되었다. 그러다가 다시 1990년 크리스티경매에서 <닥터 가쉐의 초상>이 8220만 달러에 낙찰되어 최고 경매가를 갱신한다. 400프랑에서 8000만 달러가 넘는 금액으로 뛰었으니 그 가치를 새삼 논한 들 무엇 하겠는가. 예술의 힘이 대단하다. 빈센트는 처절한 삶과 예술이 결국 꽃을 피워 세상에 하나의 획을 그은 셈이다. 빈센트는 죽어서 천국과 살아서 지옥을 오간 몇 안 되는, 전 세계 미술사가와 미술애호가들로부터 가장 사랑받는 화가 중의 한 명이 되었다.
Starry, starry night
오베르의 빈센트와 만나고 오베르기차역으로 돌아가는 길 마음이 울적했다. 대학시절 의미도 모른 채 흥얼거렸던 돈 맥클린의 「빈센트 Vincent」 노랫말이 새삼스럽다.
“별이 많은 밤입니다, 파란색과 회색으로 팔레트를 칠해 봐요...
나 이제 알 것 같아요. 당신이 내게 뭘 말하려 했는지. 당신이 온전하게 살아가기 위해 얼마나 힘들었는지, 사람들을 자유롭게 해주기 위해 얼마나 애썼는지 알아요...
별빛 가득한 그날 밤, 연인들이 종종 그러하듯이 당신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지요. 하지만 빈센트, 나 당신에게 할 말이 있었어요...
당신이 이제 무얼 말하려 했는지 나는 이해합니다. 당신의 광기로 당신이 얼마나 고통 받았는지 당신이 얼마나 자유로워지려 했는지 말이에요...”
정말 빈센트는 밤하늘의 빛나는 별이 되었을까. 오늘밤도 별이 총총.
글·사진 최선호 서양화가
최선호
서울대학교 회화과 및 동대학원, 뉴욕대학교(NYU) 대학원 졸업, 성균관대학교 대학원 동양철학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간송미술관 연구원, SADI(삼성아트디자인 인스티튜트) 교수 및 한국전통문화학교 교수를 역임하였다. 현재 전업화가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