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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질랜드 생활/Diary of Jung

이슬람, 기독교와 무엇이 다른가

by 뉴질랜드고구마 2011. 10. 10.


이슬람, 기독교와 무엇이 다른가

 

글쓴이: 김영남
           서울신학대학교 겸임교수
           아시아 연합신학대학교외래교수, 호서대학교, 나사렛대학교 등 강사역임
           이화여자대학교 지역연구학(이슬람지역) 박사
           미국 Trinity Evangelical Divinit school  




< 제 목 > 이슬람, 기독교와 무엇이 다른가


오 늘날 이슬람 세계의 소식들이 거의 신문에서 끊이지 않고 전해지고 있다. 중동이나 이란 또는 아프가니스탄 등지에서 불안한 소식들이 들려오는가 하면, 한편으로는 석유로 인한 자본 때문인지 중동이 금융의 중심지로 떠오르고, 특히 한국 건설 산업의 주요 시장이 되어 사람들의 큰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요즘 한국 경제에 활력을 주고 있는 중동 진출을 위해 많은 대학생들이 아랍어 수업에 몰리고 있다고 한다. 대학을 나와도 취직이 안 되는데 새로 부상하는 아랍지역에서 경제활동을 한다는 것도 젊은이들에게는 새로운 도전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젊은 기독인들은 대부분 선교적인 마음으로 그런 도전에 임하기도 한다. 선교한다는 마음으로 무슬림과 결혼까지 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원래의 동기는 선교적 마음에서 시작된 일이겠지만 이슬람교에 들어간다는 것은 교회에 가는 것과는 아주 다르다. 구도적 마음으로 교회에 다니는 사람이 진리를 발견하지 못하는 경우 교회에 계속 다닐 것인지 여부는 자신의 결단에 달려있다. 그러나 기독교와는 달리 한번 이슬람 사회에 들어간 사람은 나오기 어렵다.

지금 한국에 많은 무슬림들이 활동하고 있고, 그들의 활동은 선교와 전혀 무관하지 않다는 것을 우리 기독인들은 인지할 필요가 있다. 이슬람은 하나의 이데올로기로서 정치적 힘이 있다. 그래서 이슬람권에서는 기독교 선교사를 자기 시각으로 보기 때문에 기독교 선교사들이 이슬람 사회에 위협으로 느껴질 수밖에 없고 그에 대한 대응이 정치적인 것과 결부하여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한국교회는 이슬람에 대하여 무지할 뿐 아니라 무관심하다. 기독교와 마찬가지로 강력한 선교적 종교인 이슬람이 2020년을 한국에서 선교적 결산의 해로 삼는다는 것은 뜬소문이 아님을 대학 캠퍼스에서 활동하는 사람들은 곧 실감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 러므로 필자는 유대교와 마찬가지로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삼고 있는 기독교와 이슬람은 유사한 점이 무엇이고 다른 점이 무엇인지를 살펴봄으로써 이글이 독자들에게 이슬람의 전망과 그에 대한 대응책을 심각하게 숙고해볼 수 있는 기회가 되기를 바란다.


이슬람, 기독교와 무엇이 같고, 무엇이 다른가?

이 슬람의 경전 꾸란은 무함마드가 단독으로 22년 간 받았다고 하는 계시로서 기독교 신약성서의 약 4/5에 해당하는 분량이며, 성경의 많은 각색된 이야기들과 움마를 위한 규범들을 내용으로 하고 있다. 꾸란에 있는 많은 성경의 내용들이 성경의 내용과 다르게 기술되어 있기는 하지만 예수에 대한 언급은 꽤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 또한 예수의 동정녀 탄생을 인정하며 가장 위대한 예언자들 중의 하나로 들고 있다. 이것이 바로 기독교와 이슬람이 대립하는 가장 중요한 문제이다.

이슬람이 예수에 대하여 굉장한 존경을 갖고 관대한 관점을 견지하고 있다 할지라도 예수의 신성을 부인하는 것은 기독교의 핵심에 도전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이슬람은 예수의 십자가 사건은 물론이고 부활사건을 부인한다. 그러기 때문에 대속의 원리가 이슬람에는 있을 수 없다. 이러한 예수의 십자가 사건에 대한 서로 다른 이해로 말미암아 두 종교는 평화의 종교보다는 폭력의 종교 모습을 띠게 된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서로 다른 이해가 두 종교 간 대립의 결정적 요인이기는 하지만 아브라함을 조상으로 하는 유일신교의 근원을 볼 때 왜 같은 하나님을 두고 서로가 싸우는가 하고 혼란을 느끼는 사람이 많이 있을 것이다.

이런 혼란은 결국 예수에 대한 확실한 이해와 믿음을 통해서만 해결될 수 있고, 이 문제가 해결 되지 않음으로써 이슬람권 선교에 나섰다가 이슬람으로 개종하는 사례가 발생하기도 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이슬람을 더 알고 관심을 가져야 되는 것이 이슬람의 도전에 직면한 오늘의 기독교인들에게 필요한 일이기는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성경과 그 성경이 지시하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를 확실히 아는 것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무엇에 혹은 누구에 대해서’ 아는 것과 ‘무엇 혹은 누구를’ 아는 것과는 차이가 있다. 이슬람에 대해서 알되 예수 그리스도를 더욱 알기 바라며 두 종교의 유사점이 무엇이고 다른 점이 무엇이며 어떻게 다른지를 살펴보자.

우선적으로 보면 두 종교가 공유하고 있는 사상은 시간에 대한 것이다. 이슬람은 기독교와 마찬가지로 창조 신앙으로서 세상의 처음과 종말사상을 지니고 있다. 창조의 과정이 다르게 기술되어 있기는 하지만 직선적 시간 개념이나, 시간을 비롯한 모든 것의 주관자가 창조주라는 사상은 인간의 죽음과 부활 심판과 연결되며, 유일신 사상에 근거한다.

유대교를 비롯하여 기독교와 이슬람이 유일신 종교로서 모두 아브라함을 조상으로 삼고 있다는 사실은 그 뿌리의 공통성을 말해준다고 하겠다. 고대 근동 지방의 다신론적 상황에서 아브라함의 소명은 유일신 하나님의 자기 계시 방법이었다. 하나님은 오직 한 분이시며 그는 만물의 주권자시라는 것이 유일신 종교의 핵심인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 유일신 하나님에 대한 이해이다. 그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복의 통로가 될 것임을 약속하셨고 그 약속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취되었다고 기독인들은 믿는다. 바로 이것이 세 개의 유일신교가 대립하는 이유가 된다.

유 대교는 아직 메시야가 오지 않았다고 주장하지만, 이슬람에서는 예수를 메시야로 인정한다. 그러나 그가 본질상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거부한다. 따라서 그들은 삼위일체 하나님을 유일신 사상으로 간주하지 않으며 그렇기 때문에 기독교인들을 다신론자 혹은 불신자라고 비난한다. 유일신(타위드라) 사상은 이슬람에서 가장 중요한 기본이며 모든 교리와 사상의 근거가 되는데, 무슬림들이 삼위일체 하나님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무리가 아니다. 삼위일체 신비는 성령의 조명이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그들이 삼위일체 하나님을 이해했다면 이슬람이 생겨나지 않았을 것이다.

이슬람에서 알라(기독교 하나님과 구분하기 위해 이렇게 표기하겠다)는 완전한 초월자이며 아무도 그를 알 수 없다. 알라와 인간의 관계는 주인과 종의 관계이다(무슬림들 이름 중에 압둘라는 ‘알라의 종’이라는 뜻이다). 주인과 종의 관계는 종의 행위에 따라 상과 벌이 주어지는 관계이다. 그런데 기독인들은 하나님을 감히 아버지라고 부른다. 절대 초월자이신 하나님께서 인간의 역사에 개입하신 예수 그리스도 사건으로 말미암아 인간은 하나님의 자녀의 권세를 얻고 그의 상속자가 된 것이다. 이 얼마나 엄청난 관계인가?

무함마드는 사람이 가장 중요하게 여길 것은 알라를 예배하는 것이라고 했다. 무슬림들의 행위는 알라를 위한 것이라면 어떤 행위이든 정당화된다. 심지어 인간은 알라를 위해 죽고 죽일 수 있다고까지 한다. 필자는 어떤 무슬림 학자가 ‘이슬람에서는 인간이 하나님을 위해 죽고, 기독교에서는 인간을 위해 하나님이 죽었다’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 정확한 지적이다. 알라의 영광이라는 명분으로 죽고 죽임을 서슴지 않는 극단적 무슬림들을 보라. 이런 알라에 대한 인간의 사랑은 본래 하나님이신 분이 인간을 그토록 사랑하사 인간을 위해 죽으신 하나님의 사랑을 감히 비교 할 수 있겠는가? 이런 사랑의 차이를 알면 기독인으로서 이슬람을 대할 때 어찌 흔들림이 있겠는가?

하 나님과 인간의 관계에 대한 이런 이해와 더불어 결정적으로 두 종교 간에 다른 점은 죄와 구원관이다. 이것은 인간이해와 관련된 문제이다. 아담의 선악과 사건을 이슬람에서는 인간의 실수로 이해한다. 이런 실수는 죄가 아니고 인간의 연약성 때문이므로 인간이 실수를 하지 않도록 알라는 인생 가이드북의 결정판인 꾸란을 보냈고, 꾸란이 지시하는 대로 지키기만 하면 사람들은 구원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이슬람에서는 인간의 원죄를 찾아볼 수 없고 원죄를 없애줄 대속의 개념도 있을 필요가 없는 것이다. 자기 죄는 자기가 선행으로 갚을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그래서 이슬람은 행위의 종교가 되는 것이고 무슬림들이 다섯 가지 실천 신앙을 중요하게 여기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슬람은 전적 타자(他者)에 의한 구원이라는 기독교적 구원관과는 완전히 다른, 자력 구원의 개념을 함의하고 있다. 예수께서는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고 말씀하셨다. 아담의 불순종을 원죄로 이해한 기독교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이 없이는 누구도 구원을 얻을 수 없음을 분명하게 명시하고 있다. 인간 안에 있는 자기 내재적인 죄성을 보고자 하는 가난한 심령이 아니면 이해 할 수 없는 대속의 원리다.

이슬람 지역의 사람들은 누구나 무슬림으로 태어나서 그들이 전수한 신앙 외의 다른 것을 생각 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해 있다. 모로코의 여성 정치 사회학자 파티마 메르니씨는 이슬람 세계의 가부장적 역사와 정치권력에 대해 비판을 가하면서, 자신이 무슬림인 것은 이슬람 지역에서 태어났기 때문이지 자신의 결단에 의한 것이 아니라고 한바 있다. 그러면서도 그녀는 근본적인 비판, 즉 꾸란에 대해서는 문제를 제기하지 못하고 있다. 그것은 신성모독과 관련되기 때문이다. 신앙인으로서 자기정체성의 문제는 비단 메르니씨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닐 것이다. 대부분의 무슬림들은 자신의 인격적인 결단과는 상관없이 자신이 속한 움마 내에서 이슬람을 따르고 있지만, 고넬료 처럼 갈급한 심령이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세상이 알 수도 없고 줄 수도 없는 예수 그리스도의 평안이 없이는 궁극적 평안을 어떤 종교도 제공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슬람 선교에 대응하여

그 런데 안타까운 것은 이슬람의 선교전략으로 인해 과거 기독교지역이었던 서구유럽지역이 이슬람화되어 간다는 사실이다. 프랑스 인구의 10% 이상이 무슬림이고, 러시아와 영국 그리고 네덜란드에서도 무슬림의 인구는 계속 증가하고 있는데, 그러면 그 사회에서 이슬람법 적용이 요구될 것이다. 이제 한국 사회도 기독교의 안전지대가 더 이상 아니다. 소위 일류학교 캠퍼스마다 무슬림들이 상당수를 차지하고 있고 이들은 향후 이슬람 학교에서 중요한 지식 인적 자원으로 사용되기 위해 준비 내지는 완료한 상태이다. 무슬림들이 자기 종교적 신념에 따라 선교하는 것을 방해할 권한이 우리에게는 없다.

그러나 기독교인이 이슬람으로 개종하는 일은 적어도 막아야 하지 않은가? 이슬람으로 기독교인들이 개종하는 이유는 대부분 교회에서 받은 상처 때문인데, 만약 기독인이 바른 신앙관을 갖고 있다면 이슬람으로의 개종은 발생하지 않을 것이다. 앞에서도 살펴본 두 종교가 비슷한 점을 든다면 바른 기독교신앙관이 없는 이들은 쉽게 이슬람으로 개종할 수 있을 것이다. 창조 신앙이나 유일신관은 이슬람교 전파에 오히려 유리하게 작용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상당한 한국 무슬림 학자들이나 무슬림들이 한때 기독교인이었다는 사실은 이를 뒷받침한다.

이 제 한국 교회는 성공시대의 영웅주의적 교회 교육을 중지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닮는 성경교육을 해야 한다. 그리고 공동체성을 강조하는 무슬림들에게 아름답고 건강한 그리스도의 몸인 기독교 공동체를 보여줌으로써 그 안에 있는 소망에 대해서 질문하게 해야 한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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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주제 : 이슬람교의 본질
퍼온 곳:  
http://skji.hihome.com/history_w/wh063_003.htm

* 2008년 이스라엘-가자 지구 전쟁을 계기로
이주화 한국 이슬람교 사무총장에게 듣는다.

  [ 2009.01.22. 중앙일보]


이슬람교의 본질


1) 2008~2009년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가자지구의 전쟁의 본질은 영토 분쟁이다.

사안의 본질은 종교가 아니다. 영토 분쟁이다. 아라비아 반도에는 아랍 사람들이 오랫동안 살아왔다. 그런데 어느 날 이스라엘이 조상의 땅이라며 들어왔다. 주권을 잃은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지금까지 싸우고 있는 것이다.


2) 이슬람교의 본질

‘이 슬람’의 뜻은 ‘하나님께 복종함으로써 자신의 평화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것들과의 평화를 이루는 것’을 뜻한다. 이슬람의 가르침은 공존과 공영이다. 이슬람 경전인 『꾸란』에도 ‘너희에게는 너희의 종교가 있고, 우리(무슬림)에게는 우리(무슬림)의 종교가 있다’(109장6절)는 구절이 있다. 그래서 이슬람에는 타종교와 공존, 공영할 수 있는 문이 열려 있다.


3) ‘한 손에는 칼, 한 손에는 꾸란’이란 말은 뭔가.

“이 슬람 경전에는 그런 구절이 없다. 교리에도 그런 내용은 없다. 그건 이슬람에 없는 얘기다. 역사를 따져보라. 이슬람 밖에서 나온 얘기다. ‘한 손에는 칼, 한 손에는 꾸란’이란 말은 ‘이슬람은 무력의 종교’라는 뉘앙스를 강하게 풍기고 있다. 역사 속에서 왜곡된 표현이다.” 실제 역사학자들은 ‘한 손에는 칼, 한 손에는 꾸란’이란 표현이 이슬람 세력과 전쟁을 하던 십자군에서 나온 것이라고 말한다.


4) ‘지하드(성전; 聖戰)이란 말은?

“‘지하드(Jihad)’는 원래 그런 뜻이 아니다. ‘노력하다’ ‘힘쓰다’란 뜻이다. ‘지하드’는 ‘하나님의 길에서 노력하라’는 의미다. 무슬림(이슬람 신자)이 자신의 신앙을 지키기 위해 예배하고, 단식하고, 기도하는 행위 자체를 ‘지하드’라고 한다. 이슬람에는 ‘지하드납시(Jihad al-Nafsi)’란 말이 있다. ‘자기 자신과의 투쟁’이란 뜻이다. 무슬림은 지하드 중에서 가장 힘든 지하드가 ‘자기 자신과의 투쟁’이라고 말한다.”


5) 유대교와 기독교, 이슬람교는 무엇이 다른가.

“우리는 세 종교의 뿌리가 하나라고 본다. 그래서 이슬람은 다윗의 시편, 모세의 구약, 예수의 신약을 모두 수용한다. 예수가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난 예언자임을 인정한다. 그러나 구세주(메시아)로는 보지 않는다. 예수를 다윗이나 모세처럼 하나님의 계시를 전한 예언자 중의 한 명으로 볼 뿐이다. 그래서 하나님과 예수와 성령을 하나로 보는 삼위일체를 인정하지 않는다. 그게 기독교와의 차이점이다.”


6) 유대교는 어떤가.

“유 대교는 예수를 아예 인정하지 않는다. 구세주로도 안 보고, 신약성경도 인정하지 않는다. 유대교는 지금도 유대 민족을 구원할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다.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는 모두 유일신관을 갖고 있다. 이슬람교는 모두 하나의 신이라고 본다. 반면 기독교는 이슬람의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다. 또 유대교는 기독교의 예수도, 이슬람교의 하나님도 인정하지 않는다. 그런데 세 종교의 조상은 모두 아브라함이다.”


7) 왜 메카를 향해 하루 다섯 번씩 절을 하나.

“동양철학에선 ‘일일삼성(一日三省·하루 세 번 나를 돌아본다)’이라고 했다. 이슬람 신앙에선 하루 다섯 번씩 자기 성찰의 시간을 가진다. 메카를 향해 절을 하며 기도도 하고, 참회도 한다. 하나님의 가르침대로 살았는가를 따져보는 시간이다.” 

[이상은 2009.01.22. 중앙일보 기사, 이주화 한국 이슬람교 사무총장과의 대담에서


8) 이슬람교

이 슬람교의 예언자 무함마드는 570년 사우디아라비아의 메카에서 유복자로 태어났다. 6세 때는 어머니마저 여의었다. 40세 때 동굴에서 명상을 하던 그는 하나님(알라)의 계시를 받고 이슬람 경전인 『꾸란』을 기록했다고 전해진다. 당시 아랍 부족들은 다신교를 믿었다. 유일신 하나님을 주창하던 무함마드는 박해를 받고 망명길에 오르기도 했다. 나중에는 아랍 반도를 통일해 이슬람교로 통합했다. 현재 전세계 이슬람 신자는 13억8900만 명으로 추정되며 21억3300만 명인 기독교도 다음으로 많다. 국내 이슬람 신자는 한국인 3만5000명, 외국인 10만 명이다.

▩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는 한 뿌리에서 나왔으나 서로 차이가 있다.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

예수= 메시아                 ×, 아직 기다림     ○                ×,예언자 중 한사람
삼위일체(하느님,예수,성령) ×                   ○                ×                        
첫인류 ; 아담 이브              ○                  ○                ○                        
믿음의 조상 ;  아브라함       ○                  ○                ○                        
이브의 창조                       아담의 갈비뼈  아담의 갈비뼈 아담에게서 나옴    
원죄                                 ×                  ○                  아담 이브 회개로  
                                                                                용서받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