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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아일랜드 피의 과거로 회귀하나[연합뉴스]

by 뉴질랜드고구마 2009. 3. 11.

북아일랜드 피의 과거로 회귀하나

연합뉴스 | 입력 2009.03.11 09:16 | 수정 2009.03.11 10:29 |

 

영.아일랜드 정치권 테러 비난.."평화정착 노력 계속"

 

(서울=연합뉴스) 김용래 기자 = 최근 며칠 사이 북아일랜드에서 영국 군인들과 경찰이 총격으로 사망하는 사건이 잇따르자 북아일랜드의 유혈분쟁이 다시 시작될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확산되고 있다.


지난 7일 밤(현지시각) 북아일랜드의 수도인 벨파스트 북서쪽 앤트림 영국군 기지에서 군인 4명이 총격을 받아 숨진 사건에는 '진정한 IRA'(Real IRA.RIRA)라는 IRA(아일랜드 공화군)의 분파 조직이 배후에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불과 이틀 뒤인 9일 밤에는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관이 괴한의 총격을 받고 또 숨졌는데 '연속 아일랜드공화군(Continuity IRA)'이라는 또 다른 IRA의 분파조직이 자신들의 소행이라고 주장하고 나섰다.


북아일랜드에서는 30년 동안 소수의 가톨릭계 원주민과 영국계 개신교 이주민들 사이에 유혈 분쟁이 끊이지 않다가 1998년 권력분점 협정(굿프라이데이 협정)을 맺고부터 안정이 찾아오기 시작했다.


그러나 '연속 아일랜드공화군'과 '진정한 아일랜드공화군' 등 IRA의 두 분파는 IRA가 공식적으로 무장해제를 선언한 뒤에도 평화정착 노력에 반대하면서 영국의 통치가 전복되고 아일랜드가 통일될 때까지 무장투쟁을 포기하지 않겠다고 주장하고 있다. 지난 1998년 29명이 숨진 차량 폭탄테러에도 RIRA가 배후에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이들 강경조직은 가톨릭계 원주민 사회에서 광범위한 지지를 얻지는 못하고 있지만 이들의 테러 행위가 연속적인 보복 폭력을 불러일으킬 잠재력이 있다는 것이 문제다.


이에 따라 영국과 아일랜드 정치권은 일제히 북아일랜드가 유혈분쟁의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들어서는 안 된다며 평화정착 노력을 계속하겠다고 입을 모으고 있다고 AFP 통신 등 외신들이 보도했다.


브라이언 코웬 아일랜드 총리는 10일 "시민과 민주적 대표자들은 폭력에 반대하며, 우리를 과거로 끌고 들어가려는 악의 무리를 이겨낼 것"이라며, 아일랜드 의회의 모든 정당이 공동으로 비난 성명을 발표하면 이런 노력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마이클 마틴 아일랜드 외무장관도 이날 영국 각료들과 회담한 뒤 "소수의 악인은 사람들을 죽게 할 순 있어도 우리가 아일랜드 사회에서 만들어온 발전과 번영을 해칠 수는 없다"고 말했다.


더모트 애른 아일랜드 법무장관은 "친 영국계 무장조직의 반격이 있을지 모른다는 우려가 있다"고 말하고 경찰이 은밀한 방법으로 수집한 증거를 법정에서 이용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법안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무차별적인 테러에 대해 보다 수사기관이 보다 강력하게 대응하겠다는 뜻이다.


고든 브라운 영국 총리도 "옛날로 돌아가는 일은 없을 것"이라며 최근 발생한 일련의 테러 사건이 북아일랜드에서 3천700여명의 목숨을 앗아간 유혈분쟁으로 다시 격화되지 않도록 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영국령인 북아일랜드의 정치 지도자들도 신.구교도 주민들 간의 평화정착 노력에 피해가 가서는 안 된다고 입을 모았다.


북아일랜드 자치정부 피터 로빈슨 총리는 "이 사람들(테러 배후 세력)은 아일랜드의 반역자들로 아일랜드인들의 정치적 바람과 희망, 기대를 모두 져버렸다"며 "그들은 어느 누구의 지지를 받을 자격도 없다"고 비난했다.


또 다른 두 명의 북아일랜드 정치인은 투자 유치를 위해 미국에 출장을 가려다 계획을 수정해 총격으로 숨진 경찰관의 부인을 만나 위로하기도 했다.


yonglae@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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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아일랜드의 역사

 

아일랜드 섬의 북동부를 차지하며 남쪽과 서쪽으로 아일랜드 공화국, 동쪽으로 아일랜드 해와 노스 해협, 북쪽으로 대서양과 접한다. 유서 깊은 얼스터 지방의 일부만을 포함하지만 가끔 얼스터 지방으로 지칭된다. 면적 14,144㎢, 인구 1,685,267(2001).

 

 

20세기까지 북아일랜드의 역사는 아일랜드 역사의 일부였다. 그러나 5, 6세기부터 켈트어로 울라이드(얼스터)라 알려진, 뚜렷이 구별되는 그리스도교 문화가 북부지역에서 발달되었다. 얼스터의 역사에 대해 문서화된 가장 초기의 기록은 7세기의 것이다. 8세기에 이르러 섬의 씨족들이 무리를 지어 5개의 지역을 형성했는데, 그중 오닐 왕조 밑의 얼스터가 11세기까지 주도세력이었다. 12세기 중반에 잉글랜드, 사우스웨일스, 유럽 대륙으로부터 온 노르만족이 아일랜드에 정착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1205년 잉글랜드 플랜태저넷 왕가의 존 왕이 이곳을 점령하고 얼스터 백작을 탄생시켰다. 16, 17세기에는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에서 온 이주자들이 개신교 신앙을 갖고 아일랜드, 특히 얼스터에 정착했다. 얼스터의 개신교

인구는 1685년 낭트 칙령 폐지 후 자신들의 고향을 떠나야 했던 위그노들이 18세기에 이 지역을 피난처로 삼음으로써 더욱 늘어났다. 이민자들의 상공업 기술은 리넨 제조업의 발달에 기여했으며, 이 리넨 제조업은 19세기 벨파스트·래건밸리의 산업화에 토대가 되었다.

 


1801년 합동법에 따라 연합왕국(United Kingdom)이라는 이름아래 영국 본토(Great Britain)와 아일랜드의 법률상 통합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1840년대의 대기근을 포함한 19세기의 많은 위기로 인해 아일랜드 지방자치(제한적 자치정부)를 성취하려는 세력이 생겼다. 최초의 아일랜드 자치법안은 1886년, 2번째는 1893년, 3번째와 마지막 것은 1912∼14년에 각각 상정되었다. 하지만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인해 법령의 발효가 전쟁이 끝날 때까지 연기되었다. 1920년 아일랜드 정부법

은 어느 정도의 자치권을 갖는 2개의 자치제 설립을 규정했는데, 1개는 얼스터의 9개주 가운데 6개주(지금의 북아일랜드)로 구성되고, 다른 1개는 얼스터의 나머지 3개주와 함께 남아일랜드의 23개 주(지금의 아일랜드 공화국)로 구성되었다. 남아일랜드는 1916년의 부활절 봉기에 의해 과격화되어 완전독립을 요구하면서 아일랜드 지방자치를 전면 거부한 반면, 얼스터의 6개 주는 영국 본토와의 합병을 더 선호했지만 지방자치를 하는 것으로 일단락 되었다.

 


1921∼40년 북아일랜드는 공공연한 종파주의 국가로서, 다수를 차지하는 개신교도들이 그들의 이해관계에 따라 국가를 지배했다. 소수의 로마 가톨릭교

도들은 차별로 인한 고통을 당하면서도 시골로부터 섬유업과 조선업 부문에서 일자리를 찾을 수 있는 벨파스트 같은 공업중심지로 몰려들었다.

 


1960년대 중반 위태롭게 지속되던 북아일랜드의 안정이 깨지기 시작했다. 1968년에는 당시 미국 흑인들의 민권운동에 고무된 로마 가톨릭교도 들이 벨파스트와 런던데리를 중심으로 시민권 확보 투쟁을 벌임으로써 신·구교 세력 간 종파주의 갈등이 폭력적 상황으로 치달았다. 공식적·비공식적 공격에 대한 가톨릭교도 보호를 위해 활동하는 게릴라들인 프로보스(Provos)의 출현과 함께 아일랜드공화국군

(IRA)이 활동을 재개했다. 프로보스의 정치적 주장은 영국군의 즉각적인 철수와 신교도에 의한 국가지배의 종식이었다. 이에 맞서 신교 세력은 자체적인 준(準)군사조직을 만들었다. 1970년대초 영국군이 평화유지라는 명목으로 북아일랜드에 진주했지만 얼마 안되어 이들은 가톨릭교도들에게 달갑지 않은 외부세력의 대변자로 비쳐지게 되었다. 영국군의 철수를 북아일랜드와 아일랜드 통일의 사전단계로 간주한 IRA는 이를 위해 테러 시위를 계속했다. 1972년 3월 영국 총리인 에드워드 히스는 북아일랜드의 헌법과 의회의 효력을 정지시키고 내각 관료인 북아일랜드 장관을 임명해 이 지역 문제를 맡겼다.

 


1971∼76년 최악으로 치달았던 상황은 1980년대에는 다소 호전되기 시작했으나 여전히 1년에 50∼100명이 정치적 학살과 암살로 숨지는 등 1990년대 중반까지 분쟁으로 인한 희생자 수가 무려 3,100명이 넘었다.
1980년대 이루어진 화해의 시도 가운데 주목할 만한 것은 1985년 체결된 영국-아일랜드협정으로 아일랜드가 북아일랜드 문제에 처음 공식적 자문 역할을 한 것으로 기록되었다. 1990년대에는 북아일랜드의 주요 합법 정당들이 모여 평화회담을 열었는데 IRA의 과격파 정치조직인 신페인당은 IRA가 연합론자(북아일랜드와 영국의 통합을 주장하는 세력)들의 군사조직과 마찬가지로 계속 테러를 자행한다는 이유로 회담에서 배제되었다. 평화회담의 골자는 북아일랜드 주민들의 자결권을 보장하고, 북아일랜드 국민의 다수가 동의할 경우 아일랜드와의 통합을 영국 정부가 인정하며, 북아일랜드의 정치가 안정될 경우 아일랜드는 북아일랜등에 대한 헌법상의 주장을 포기한다는 것 등이었다. 1994년 IRA와 연합론자 군사조직 간의 휴전이 이루어 지고 종파 갈등의 정치적 해결을 위한 영국 정부와 IRA의 공식 대화가 시작됨에 따라 한동안 평화가 유지되는 듯했으나, 1996년 2월 IRA의 폭탄 테러를 시발로 휴전은 파국을 맞았다. 1997년 토니 블레어가 영국 총리에 당선되고 활발히 평화협상을 벌인 결과 1998년 4월 영국과 아일랜드 간 평화협정이 체결되었다.